어느 날 제주 산책.

특별하지 않은 날의 위로.

by Sunyeon 선연


다 내려놓지 못한 스트레스들을 어깨에 얹고, 저번 주엔 호기롭게 제주도행 티켓을 끊었다. 제법 가볍게 챙겼다고 생각한 배낭이 왜인지 조금 거추장스럽게 느껴졌지만 뭐, 이것도 그냥 나스럽고 그것 그대로 일상 같아서 조금 지질하면서도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오전 알람을 맞추었다 생각했지만 결국 오후 알람이라 시작부터 잘못 끼운 단추를 질질 끈 채 삽질하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짧은 여행이 나를 들뜨게 해 주리라는 이상한 믿음 같은 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집 앞까지 6분이 걸린다던 택시 기사님은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내게 제가 초행이라, 하며 뒷머리를 슥슥 긁으셨다. 좋은 분이구나, 생각했다. 설마 정말 비행기를 놓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공항까지 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든 기사님에게 충분히 그러실 수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예상하던 대로만 하루가 흘러가면 사실 재미없을지도 몰라요, 짐짓 아는 체도 하고. 건방진 위로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은 출발 비행기 티켓을 새로 검색할 때였다. 다음 편이 전부 매진이라 대기 예약을 걸어야 한다는 설명을 듣고 그럼 취소해주세요, 하고 쉽게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겨우겨우 두어 시간 늦은 출발 편 비행기를 잡아두고 공항 안을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족적들을 들었다. 평일 오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새벽 내 축적된 졸음이 밀려올 때 내가 잘 못 잤구나, 를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렇게 깨달으니 또 새삼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쉬는 날이라도 늦잠이나 자고 있다가 꿈에 쫓겨 부스스하게 일어나 앉아 밀린 집안일이나 쳐다보고 있을까, 생각하면서.


탑승 시간까지 특별히 할 일도, 해야 할 것도 없었다. 덜컥 무료하고 불안했지만 최근에 이런 무료하고 불안한 시간이 아예 없었다는 생각이 들자 이내 편안해졌다. 사람이란 참 이상하지, 그리 여유가 넘칠 땐 바빴으면 싶더니 정작 단단히 조여지니 또 느슨하게 풀어지고 싶다니. 잠시 우스워 헛웃음을 웃었다.


가는 비행기 안에선 유난히 푹 잤다. 안구의 한 자리를 그대로 꿰찬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을 렌즈가 간질간질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보고 싶었던 곳을 찾아 택시를 타고,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근처의 바다를 하릴없이 걷고 짠내를 수도 없이 맡았다. 인스타에서 힙하다는 카페에 도착해 샷을 하나 넣은 듯한 밍숭한 아메리카노를 환상적인 바다를 보며 마실 때에도 너무 오랜만에 맞이하는 해방감에 발가락이 간질거려 참을 수 없을 만큼 웃음이 났다.


태풍이 지나간 제주는 맑고 깨끗했고, 이따금 빛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던 바닐라 색 구름은 오후 세시 이후로는 표정 바꾸기를 멈추었다. 완벽한 물색 하늘이었다. 다섯 시가 넘어서도 쨍 쨍 물에 번쩍번쩍 빛을 반사하는 태양을 뒤통수를 벗 삼아 걸었다. 해안 산책로였다. 한담 해변을 지나 곽지로 가는 길. 35분 동안 뒤통수를 스윽 빨리도 스캔하고 지나가는 볕과 그 볕에 따라 달라지는 물 색들을 만났다. 거의 뭐에 홀린 듯 사진을 찍어댔고, 볕이 보이는 풀들 앞에선 그냥 바닥에 털퍽 앉기도 했다.
바다가 있는 풍경의 시간은 조금 더 빨리 흐르는 느낌이다. 알면서도 그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얼굴을 하고서 산책을 하는 동안 유난히 어색하고 정겨운 풍경들을 지났다. 수많은 기암괴석, 산책하는 눈이 고운 강아지. 킥보드를 타고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아이들.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시간을 흘리는 커플. 누운 풀들, 아무것도 아닌 풍경. 그래서 의미 있는 얘기들.




이윽고 곽지해변, 슬슬 노을이 지는 해변을 산책하기 위해 짐을 풀고 바닷가를 향해 나왔을 때 나는 작년에 부산 송정의 어느 저녁에서 보았던 기적 같은 색을 다시금 만났다. 고 아무 의심도 없이 생각했다. 같아 보이지만 다른 색이겠지, 하다가 모래사장에 주저앉아 해지는 것을 지켜보기로 했다. 30분 동안 가만히 앉아 저무는 그라데이션을 눈으로 훑고 있으니 이쯤이면 저녁을 먹고 설거지쯤은 할 수 있는 시간일까, 그렇지만 거기야 그냥 깜깜해지는구나 하고 말겠지. 싶은 시답잖은 생각을 해 보게 되는 것이었다. 사진을 찍으며 이런 색은 내가 눈으로 보는 것과 달리 담기는구나 다 담을 수가 없어, 중얼거리다 이윽고 믿을 수 없는 바다의 색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 생각이 들어 금세 겸손한 마음이 되고 말았다. 이윽고, 그리고 꾸준히 밀려들어오는 파도의 포말 소리가 뇌의 한 부분을 철썩, 치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래, 아마 나는 언제건 이 풍경들 앞에선 작고 약하고 한없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아직 조금 더 흔들려도 괜찮을 것이다. 그런 하릴없는 믿음이 지는 노을과 함께 마음을 꽈악, 혹은 쿠욱. 채우는 느낌이 들었다.




해가 졌다. 슬슬 치미는 허기에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새카매진 바다의 먼 곳에서 보이는 희미한 불빛들이 아까의 화려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명멸하고 있었다. 파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캄캄한 가운데서도 철썩 , 철썩. 꾸준히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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