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나는 개명을 한 적이 있다. 보통 한글 이름들을 많이 바꾸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한자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에 물의 기운이 가득하기에 사주상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한글 이름은 작은 아버지가 지어 주셨지만, 이름에 들어가는 한자만은 우리 아버지가 손수 지어주셨다고 한다. 물 수에 밝을 정. 보석에 쓰는 그 한자. 어렸을 때는 흔하디 흔한 내 이름이 그리 달갑지 않았던 기억도 있다. 한자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을 때였다.
이름에 물 수 자가 들어가서였을까, 나는 물을 참 좋아하는 꼬마였고, 거부감 없이 물에 둥둥 뜨는 소녀였고, 또 물가 근처에만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나날들을 살아왔다. 사실 이름에 어떤 기운이 있다더라, 같은 것들을 모를 때부터 그랬다. 수영을 몰랐는데 혼자서 뜨는 법을 익히고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팔을 휘젓는 법을 배워 자유형과 배영을 곧잘 하곤 했다. 열망하던 스킨 스쿠버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지만.
'여자 이름에 물 수 자를 쓰는 건 좋지 않다.'라는 사주 이야기를 구태여 수면 바깥으로 끌어올린 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인 2009년 즈음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급작스런 뇌출혈로 사경을 헤매고 계셨고, 다시 깨어나실 수 있을지의 여부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어머니는 가끔 우셨고, 또 어떤 때는 놀라울 정도로 태연하셨고. 또 어느 때에는 갑자기 의연하게, '네 한자 이름을 바꾸자.'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급작스레, 한자 이름을 개명하게 되었다. 결국 아버지가 그 여름을 다 넘기시지 못하시고 세상을 등지셨을 때, 나는 어머니가 나의 개명을 왜 그렇게 서두르셨는지 의아했었다. 아마도 무언가 변화를 주는 것이 아버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거라는 사주팔자라도 어디선가 보고 오신 걸지 모른다. 아버지가 오십 대를 다 넘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는 사주를 타고났다는 이야기를 어느 점쟁이가 했다고, 어머니는 아버지 무덤 앞에서 덤덤하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물 수에 밝을 정. 나는 이제 그 한자가 새겨진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지 않지만 가끔 보석 같이 살라고 처음 생긴 딸의 한자 이름을 오래도록 고르셨을, 아버지의 얼굴을 가만히 상상해보곤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에 나는 내 이름의 물기를 잃었지만 여전히 아끼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때 가장 끝에, 한자로 내 물기가 남은 이름을 소담스럽게 적게 된다. 사주 이야기야 어떻든 나는 내 이름에 가득한 물의 기운을 여전히 사랑하고, 그 이름을 지으셨을 때의 아버지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