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문득 떠오르는 것들을 가만히 적어보는 하루. 손에 잡힐 것 같았던 오늘의 구름, 조금 퍼석했던 아오리 사과. 여름에는 복숭아죠, 얘기했지만 냉장고 과일 칸엔 아직 다 깎지 못한 딱딱한 복숭아가 세 알. 매일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음식은 떡볶이. 끝을 아는 영화, 그래도 볼 것 같아. 가장 졸린 시간은 오후 네 시. 최근 읽은 책은 '또다시 같은 꿈을 꾸었어.' 생각이 많아질 땐 단순한 동선으로 규칙적으로 몸을 움직일 것. 스스로를 덜 한심하게 여기기 위해 시작한 매일 글쓰기. 익숙해서 조금 서글픈 근육통.
문득 뒤에 붙으면, 어떤 문장이든 조금 그럴싸해지는 느낌이 든다. 뒤에 따라오는 말이 '떠오르는'이라면 조금 더 그렇다. 불확실한 의미를 가진 것들의 애매함을 알면서도 이유도 모르고 그런 말들을 아끼게 되었다. '아마도' '어쩌면' '문득' '우연히' 같은 말들. 다음을 기대할 수 있는 열린 결말 같은 낱말들이어서일까, 속단하지 않고 그럴지도 모른다, 는 뜻을 품는 그 애매한 말들이 열어놓는 출구가 다음을 기대하게 만드니까.
문득 열어본 일기장, 문득 떠올린 그 길. 문득 꺼낸 오래된 필름. 문득 켠 라디오. 또 문득, 생각나서 하게 되는 안부인사. 문득, 이라는 낱말 뒤에는 어떤 말들을 늘어놓아도 로맨틱하다. 모든 것이 낭만적일 필요는 없지만 가끔 아무 기대 없이 나선 길에서 문득, 아주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들에서 웃을 일 하나쯤 있다면 꽤나 그럴싸한 하루가 되지 않을까. 문득 떠올라서 연락했다고, 다가오는 생일에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느닷없이 안부 인사를 해볼까 싶다.
문득. 낭만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