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내 인생 첫 바다는 언제였을까,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예전에 이미 나는 엄마 뱃속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을 것이다. 사주에 물의 기운이 가득하다던 나는 '여행'을 떠올리면 바다가 있는 곳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어른이 되었다. 열여덟이었을까, 아홉이었을까. 같은 학원을 다니던 친구들, 선생님들과 즉흥적으로 밤의 속초 바다를 보러 떠났던 기억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인상적인 유년기 바다의 기억이다. 어릴 때야 아버지가 데리고 가셨던 해수욕장에서 튜브를 타고 해수욕을 하거나, 모래밭에 텐트를 쳐 두고 엄마가 건네주시는 무언가를 와그작와그작 씹었던 기억들만이 선연해서 특별히 바다가 좋다는 감각 이외에 특별한 느낌은 없었던 듯싶다. 고등학생, 밤의 라디오를 좋아하기 시작하고 흰 종이를 문장으로 채우는 걸 사랑하기 시작한 다음에야 바다에 대해 다르게 느낄 수 있었다.
가만히 앉아 바다의 파도 소리를 듣다 보면 내가 갖고 있던 고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때 즈음 알게 되었던 듯싶다. 수평선은 멀고 어느 먼 지점쯤에서 가끔 점 같은 배가 보이거나, 하늘과의 경계가 맞닿는 곳에서 시작하는 흐붓하고 선명한 파아란 선이 주는 안정감. 평평한 직선이 내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부서져내려 하얀 포말이 되고, 그것이 파도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라는 당연한 로맨틱함도 매력적이지만 무엇보다 다른 세기로 밀려오는 물결들이 쓸어가는 모래들이 어디로 갈까를 하릴없이 생각해 보는 시간들도 좋았다. 바다가 넓은 것은, 이 모든 것들을 다 자연스레 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도 바다를 인상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던 열여덟, 또는 열아홉 즈음이었다.
최근 본 바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바다는 바로 재작년에 본 제주의 곽지 해수욕장이었다. 마음에 많은 피로와 스스로 왜 이렇게밖에는 할 수 없느냐는 자괴감, 누군가의 인격적인 공격에 아주 많이 지쳐있었던 나는 해지는 곽지에서 30분을 같이 진 채로 있었다. 하늘이 캄캄해지는 것을, 바다가 하늘과 같은 색으로 물드는 것을 수평선이 비현실적으로 따뜻한 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넓고 넓은 세상 앞에서 나는 그저 작은 먼지 한 톨일 뿐이구나, 환호하며 안도했던 기억이 선하다. 내가 싸 가지고 갔던 근심들을 전부 내려놓을 수는 없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어서 그 어떤 것이고,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살아있으니 되었다. 는 이상한 안심감을 얻고 다시 있던 현실로 돌아갔던 기억.
돌아오는 어떤 계절 즈음엔, 가보지 않았던 어딘가의 바다를 보고 싶다. 누군가와 함께여도 좋겠지만 혼자여도 따뜻하겠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오늘 분의 스트레스나 먹먹함을 견딘다. 어딘가로 훌쩍 떠나야지, 싶은 상상.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 어쩌면 먹고사니즘을 견디게 하는 힘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