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시계
10대. 나는 내 손목에 늘 일정한 무게를 달고 다녔다. 수업을 듣고 싶지 않을 때는 초침만 세고 있을 때도 있었다. 숫자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 잔인하면서도 솔깃한 진실이었다. 성적이 좋지 않았던 나는 매번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어깨 근육을 움츠리곤 했다. 시험지에는 숫자에 따라 책임감이 매겨졌고, 때로는 학급 번호에 따라 당번이 매겨지곤 했는데, 그때의 나는 그런 숫자들이 학교에서 어떤 계급을 만드는 별 것 아닌 삶에 하릴없이 익숙해져 있었다. 당연하게 돌아가는 숫자들의 삶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없었고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는 일만큼 학생스럽게 자연스러운 일이 그때 당시에는 없었구나, 하는 생각을 지금에서야 하게 된다. 열세 살이 되었을 쯤이었을까, 바깥 액정 화면에 크게 시계가 보이는 핸드폰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각 전자회사에서는 앞다투어 '나는 최신형 시계이기도, 전화가 가능한 기계이기도 해. 심지어 가끔은 카메라가 되기도 하지.' 말하는 물건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언젠가부터는 손목에 시계의 무게를 지고 다니는 것이 상당히 새삼스러운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연락이 오지 않는 핸드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넌 핸드폰을 시계로만 쓰는구나.'가 시답잖은 유머가 되곤 하던 그 어떤 시절부터 나는, 다시금 새삼스레 그 손목시계의 무게를 그리워하곤 했다. 시계라면 오롯이, 동그랗고 숫자의 표기가 직관적으로 보이며, 시분 침이 명확한 아날로그의 그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가끔 사람들의 손목이 우아하게 곡선을 긋는 것을 우연히 보기라도 하면 '시간을 읽는 사람이구나.' 하고 혼자 내적 친밀감을 느끼는 순간들이 좋았다. 화면을 스윽, 스캔하는 움직임보다 여전히 잠시 멈춰 서서 손목을 드는 그 무게감이 좋고 누군가의 손목에 매여있을 그 무게가 새삼스레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자, 시간을 읽는 그 아무렇지 않은 제스처가 제법 로맨틱한 일이구나. 싶어 잠시 피식 웃게 된다.
충전되고 있는 스마트 워치 옆에 시분침이 멈춘 아날로그시계를 늘어두고는, 그래도 역시 손목시계라면 아날로그지, 하고 생각하게 되는 밤이다.
시간을 읽는 로맨틱함을 다시 느껴보기 위해, 멈춘 손목시계에 새 약을 넣는 수고로움쯤은 감내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