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마도 Sep 01. 2021

여름

이응의 처음은 여름이어야 한다고, 글의 목록들을 작성하며 미리 정해 두었다. 더위의 끝물에 태어난 사람이어서일까, 유난히 더위에 강한 삶을 살았다. 뜨거운 오후, 송골송골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초록이 만연한 가로수길을 걷다가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1회용 컵에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 아웃한다. 얼음이 녹으며 컵에 송골송골, 맺히는 물방울을 엄지 손가락 지문으로 훑는 순간을 사랑한다. 특별할 것 없어서 더 기분 좋은 풍경.


올해 더위는 사실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범주 안에 있었다. 여름에 강하고, 더위에 큰 거부감이 없는 나도 올해 여름엔 몇 가지의 대책이 필요할 정도였으니까. 땀을 닦을 수 있는 쿨링 티슈를 챙기고, 텀블러 안에는 얼음이 몇 알 든 물이 항상 상비되어 있었다.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설 때면 텀블러 안 얼음이 사그락 사그락, 제 존재를 옹알거리곤 했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휴대용 선풍기를, 그것도 충전이 귀찮아 가지고 다니지 않던 녀석을 가방에 챙겨 넣을 때마다 올해 여름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실감해야 했다.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숨 막히는 기온은, 텁, 하고 호흡기를 막았다. 뜨거우려고, 찬란하려고 그러는 거구나. 하는 생각 뒤에, 지구 온난화 탓이겠구나. 그다지 로맨틱한 더위가 아니구나. 하는 현실감이 따라붙는 날이 많았다. 유난히 가로수가 많은 동네 언저리에서는, 여름 매미들이 부지런히 울고, 나는 보통 그 여름의 중앙을 뚫고 출퇴근을 했다. 이 더위가 끝나긴 할까, 열대야 가운데에 누워 에어컨의 타이머를 맞추면서 생각하곤 했다. 유난히 힘들었던 기온, 개인적인 일들에 맞물려 염증을 달고 다니던 7월, 항생제를 먹어가며 지난 올해 여름의 지독한 더위를. 유난히 잊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유난히 자주 깨던 밤잠 덕에 테아닌과 트립토판, 타이로신 같은 캡슐을 털어 넣고서야 잠을 청할 수 있었던. 지독했던 올해 여름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입추가 지나자, 거짓말처럼 바람이 조금 선선해졌다. 절기는 위대하다, 고 나는 웃으며 중얼거렸다. 선조들의 현명함이란. 요즈음 밤바람처럼 좋은 걸 못 찾았다. 는 글을 최근에 올린 적이 있는데 그때보다 조금 더 시원한 바람이 부는 덕인지, 최근엔 어두운 시간. 부러 걷는 시간들이 유난히 행복하다. 계절처럼 모호한 경계도 없어, 사실은 인사 없이 보내는 친구처럼 헛헛할 때가 많다지만 이번 여름은 유난히 '뒷모습' 이 잘 보이는 느낌이라 조금 쓸쓸하면서도, 또 만날 다음 계절을 기약하게 되는 마음이 좋다. 파릇파릇한 초록, 눈부신 햇살. 그래서 생의 감각이 조금 더 섬세하게 느껴지는 뜨겁고 좋은 계절. 올해는 조금 힘들게 지나갔지만 내년에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반겨주고 싶다.


그때까지,

안녕. 여름아.





매거진의 이전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