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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 Sep 04. 2021

연필

반듯하게 잘 깎인 연필, 흑연심이 적당히 뾰족한 연필을 필통에 챙기면 그날 하루는 기분 좋은 하루였다. 등교 후 필통 뚜껑을 열었을 때 뚝, 하고 심이 부러져 있을 때도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일부러 찾지 않으면 쓸 일이 전혀 없는 게 필기구. 그중에서도 연필인데 바로 사용할 일이 없는 연필이라도 책상 앞에 두어 자루 꽂아두는 습관은 스무 살 이후로 지금까지 여전하다. 마치 식탁 위에 밥을 차릴 때, 숟가락을 사용할 일이 없어도 젓가락 옆에 꼭 놓아두게 되는 감각처럼.


엄마는 커터칼로도 연필을 아주 잘 깎으셨다. 샤파라는 이름의 연필깎이로 나무 연필을 깎으면 동글동글, 맨질맨질해지는 나무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면, 엄마가 깎는 그 방법은, 육각의 연필을 또 여러 개의 각으로 나누는 작업이었다. 엄마는 힘을 들이지 않고도 금세 연필 하나를 뚝딱 깎아내곤 하셨다. 물론 나는 뾰족한 흑연을 더 좋아해서 엄마가 깎은 그것보다는, 샤파로 깎은 그것을 더 선호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씩은 이면지 한 장을 책상 위에 두고 커터칼을 드르륵 밀어 연필을 깎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무엇보다도 손 끝에 닿는 사악, 사악. 만져질 것 같은 소리가 좋아서였다. 다 깎은 연필 심을 보고 있으면 나무의 일부가 만들어낸 먼지구나. 하는, 짐짓 별 것 아닌 감상이 솟았다. 샤파로 연필을 깎았을 때에는, 연필 심을 비울 때가 제일 좋았다. 일부러 나무 냄새를 맡겠다고 코를 킁킁거렸던 기억. 


그림에 별 재능이 없다는 걸 알고 난 이후에는, 사실 연필에 큰 애정을 들일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20대 후반 즈음 만난, 그림을 하시는 좋아하는 지인을 통해서 새 연필을 몇 자루 선물 받을 일이 있었다. 2H 같은, 어렸을 때에는 사용해 본 적도 없었던 새 연필을 다시 깎으며 다시 감상에 빠졌다. HB, 4B, 2B. 다른 흑연들이 주는 매력을 종이 위에 스윽 스윽 그어보기도 하고. 필기구를 매우 좋아하던, 그분께 받은 연필들은 아직도 내 책상 앞에 가지런히 꽂혀 있다. 어릴 때의 감각을 조금이나마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준,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귀한 선물들이다. 


얼마 전에는, 연필을 가지고 나가 필기를 했다. 흑연이 생각보다 빨리 뭉툭해지는 것을 보고, 괜히 나이를 먹었나? 하는 하릴없는 감각이 올라왔다. 어렸을 때에는 한참 필기해야 다시 연필을 깎을 수 있다는 느낌이어서 얼른 다시 연필을 깎고 싶다, 고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자모음을 쓰곤 했는데. 너무 빨리 글자들을 또박또박 써넣고 있기 때문인 건지, 내가 한참이나 자라서 그때보다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느껴버리고 마는 건지 모호했다. 


무언가를 쓸 일이 점점, 더 많이 줄어들고 있지만 최근 들어 빨리 완성할 수 있는 것들보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할 수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느낀다. 시간 안에 무언가를 해내야만 한다는 강박 때문에 우리는 '느림'을 기꺼이 선택하기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느긋하게 시간에 쫓기지 않고 해 볼 수 있는 것들을 가만히 하며 시간을 천천히 흘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따뜻할까. 또박또박, 흑연이 닳는 것을 미묘하게 느끼며 종이 위에 느릿하게,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무언가를 새겨 넣는 어떤 오후를 보내고 싶다고 나는 가지런히 꽂혀 있는 연필 두 자루를 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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