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 밤새 내린 비가 공기를 무겁게 적셨다. 그 습기 사이로 가을 아침의 날카로운 냉기가 바람을 타고 연서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연서는 괜찮았다. 바로 옆에 루야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연서는 항상 누구보다 먼저 출근했다. 병원 문을 열고 데스크를 정리하고, 오늘의 예약 환자를 확인하는 일과를 커피 한 잔의 여유와 함께 시작한다.
예약 장부를 넘기던 연서의 시선이 ‘하진’이라는 이름에 멈췄다.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치료를 받는 남성 환자. 지난주엔 진료를 취소하고 내원하지 않았었다.
왠지 모르게 연서는 그에게 마음이 쓰였다.
그의 눈빛엔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조용히 엉켜 있었고, 그 침묵은 연서에게 오래 남았다.
연서는 속으로 생각했다.
‘과연 루야의 깃털이 하진 씨에게도 닿을까?’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채, 연서는 하루빨리 그에게 루야의 깃털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날 오후, 예약 시간보다 10분 늦게 하진이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표정은 지난주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
조용히 데스크로 다가온 하진은 이름만 짧게 말한 뒤 말없이 진료 대기실로 향했다. 그의 침묵은 공기처럼 병원 안에 스며들었다.
진료를 마친 뒤, 하진은 수납을 위해 다시 데스크 앞에 섰다.
여전히 어두운 표정. 그 눈빛엔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 하진의 시선이 유리병 속 루야의 깃털에 머물렀다.
한참을 바라보던 하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새… 이름이 있나요?”
연서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루야예요. 감정을 먹고 자라는 새예요.”
하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오래된 감정을 조심스럽게 꺼내려는 듯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데스크 옆에 놓인 양면 색종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깃털을 접었다.
회색과 초록이 섞인, 조금은 어설프지만 단정한 깃털이었다.
그 옆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루야, 이 나쁜 감정들을 다 가져가 줘.”
연서는 말없이 그 깃털을 바라보았다.
그건 하진이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건넨 순간이었다.
하진은 아무 말 없이 병원 문을 나섰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조금 덜 무거워 보였다. 창밖 전깃줄 위에 루야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새는 하진이 남긴 깃털을 바라보다가 작은 날갯짓을 했다.
그건 말 없는 대답이었다.
“받았어. 기억할게.”
퇴근길, 연서는 병원 옆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하루 종일 마음을 꾹 눌러 담았던 그녀는 그제야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아침 내내 공기를 적셨던 습기와 가을바람의 서늘한 결은 저녁에도 변함없이 연서의 옷깃을 조용히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은 마치 하루의 시작과 끝을 조용히 이어주는 숨결 같았다.
연서는 눈을 감고 잠시 마음을 정리했다.
그녀의 곁엔 말없이 고목나무와 그 위에 앉아 있는 루야가 있었다. 그 작은 새는 연서의 숨결에 맞춰 깃털을 살랑이며 흔들었다.
연서는 생각했다.
‘하진 씨는 오늘 루야의 깃털을 접고 조금은 힘을 얻었겠지…
그 깃털이 부디, 그의 마음에 닿기를.’
그건 기도 같았고, 작은 바람 같았다.
그때,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다정’이었다.
꿈속 정원에서 루야를 만나기 전, 연서는 두려움과 불안, 전화 공포증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럴수록 불안은 더 깊어졌고, 이러다 다정이마저 잃을까 봐
가끔 울리는 벨소리는 연서에게 조용한 마음을 거칠게 흔드는
돌멩이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루야가 그녀의 마음을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에,
연서는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 너머로 다정이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서야, 요즘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보고 싶어.”
연서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무 일 없어. 요즘 더 좋아지고 있어. 나도 보고 싶어.
내일 보자.”
그 순간, 루야는 분홍빛 깃털을 하나씩 피워냈다.
그 깃털은 저녁 햇살을 받아 부드럽게 빛났고, 연서의 마음을
조용히 감싸 안았다.
연서는 처음으로 자신이 조금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말을 잘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방식이 다르더라도 그녀의 마음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루야가 함께 지켜주고 있었다.
다음날 퇴근길, 연서는 병원 근처 작은 카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창 너머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다정은 그녀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연서는 천천히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카페 안에는 신나는 90년대 댄스곡이 흐르고 있었다.
그 밝은 리듬 속에서, 다정은 익숙한 말투로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게 누구야! 우리 귀하신 연서님. 얼굴 잊어버리겠어.”
다정은 여전히 짓궂고 밝았다. 그 말투, 그 눈빛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연서는 조심스럽게 웃었다.
“응… 미안, 연락 자주 못해서.”
다정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너 그런 거 잘 못하는 거, 나도 알아. 그래도 보고 싶었어.”
그 말에 연서는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 눈빛은 늘 그렇듯, 연서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순간, 창밖 전깃줄 위에 작은 새가 앉았다. 깃털 끝엔 분홍빛이 살짝 스며 있었다.
연서는 조용히 속삭였다.
“루야…”
다정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연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으로 루야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둘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다. 다정은 주로 말했고, 연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긴 대화에 지쳐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연서는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충분히 연결될 수 있다는 걸 조금씩 믿게 되었다.
밤이 깊었다.
그리고 다시, 보랏빛 하늘이 펼쳐졌다. 그녀는 정원에 서 있었다.
꽃들은 말없이 피어 있었고, 고목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이번엔 고목나무의 가지 사이로 작은 빛들이 스며 있었다. 마치 연서의 하루가 그에게 닿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무는 연서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어땠어?”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연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조용히 대답했다.
“조금 흔들렸어요. 하지만… 괜찮았어요. 내 방식대로, 조금씩 닿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나무는 미소 짓는 듯했다.
그 미소는 마치 “그래, 그게 너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순간, 루야가 나무 위에서 날아와 연서의 어깨에 앉았다. 깃털 끝엔 분홍빛과 회색빛이 조용히 어우러져 있었다.
그건 사랑과 불안이 하루 동안 그녀를 지나간 흔적이었다.
루야는 말없이 그녀의 숨결에 맞춰 움직였다. 그녀가 떨릴 때는 가만히 멈춰 있었고, 그녀가 눈을 감으면 살짝 날아올랐다.
연서는 조용히 속삭였다.
“내 감정이 이렇게 색으로 피어난다는 게… 조금은 위로가 돼요.
내가 느낀 것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 같아서.” 고목나무는 잎을 살랑이며 그녀의 머리 위로 빛을 흘렸다.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색이 바뀌어. 그건 흔들림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야.”
그 말은, 연서가 오늘 가장 듣고 싶었던 위로였다. 정원은 조용히 숨 쉬고 있었고, 그 안에서 연서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한적한 오후, 잔잔한 재즈 선율이 병원 안을 감싸고 있었다. 연서는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하며 창가에 앉아 있었다.
햇살이 유리병 속을 비추자 루야의 작은 깃털들이 반짝이며 빛을 흘렸다.
그때, 문득 연서의 시선이 병원 문 앞으로 향했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문 앞에서 조심스럽게 서성이고 있었다.
연서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70대 전후로 보이는 할머니는
단정한 옷차림이었지만, 깊게 새겨진 주름만큼이나 얼굴엔 슬픔이 가득했다.
연서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할머니, 혹시 저희 병원 오신 거예요?”
할머니는 잠시 망설이다가 시선을 피한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같이 나이 많은 사람도… 여기 와서 상담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연서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할머니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물론이죠, 할머니. 저희 병원은 마음에 위로가 필요한 모든 분들에게
언제나 열려 있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연서는 할머니를 조심스럽게 맞이하고 따뜻한 차를 내드린 후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무거운 사연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요새… 내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우리 며느리가 갑자기 쓰러졌어.
뇌출혈이래. 지금 병원에서 생사를 오락가락한다는데…”
말을 잇지 못한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지그시 잡아주었다.
“하나밖에 없는 손녀가 문제야. 이제 겨우 여덟 살인데, 엄마가 저러니
학교에서도 말 한마디 안 하고 그림만 그리고 있대. 그 어린것이 얼마나 겁을 먹었을까…”
할머니는 손녀 이야기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문제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는 거야. 허리도, 무릎도 성한 데가 없어서
밥도 못 차리고, 학교도 데려다 주기 힘들어. 이 늙은 몸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네…”
자책과 슬픔이 뒤섞인 말끝에 할머니는 눈물을 훔쳤다.
“내가 조금이라도 덜 아팠다면… 딸이나 아들이라도 더 있었으면 좋으련만.
이 모든 짐을 아들 혼자 짊어지고 있으니 그걸 보는 것도 미치겠고…
그래서 혹시, 여기 오면 내 이 답답한 마음이 좀 풀릴까 해서 찾아왔어요.”
연서는 침착하게, 그러면서도 깊은 공감을 담아 입을 열었다.
그녀는 할머니의 떨리는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그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확신이 있었다.
“할머니, 지금 겪고 계신 이 일은 세상 어떤 어머니라도, 할머니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큰 시련이에요. 며느님께서 꼭 힘내서 돌아오실 거예요.
지금은 의사 선생님들과 며느님을 믿고, 힘내세요.”
그때 창밖에서 루야가 날아와서 유리병 속에 깃털 하나를 남기고 날아가 버렸다. 그 깃털 색은 이번에도 회색빛이었다.
연서는 이 회색빛이 초록, 분홍빛으로 변해가길 바라면서 유리병에서 루야의 깃털 하나를 꺼냈다.
“이건 제가 아끼는 작은 깃털이에요. 여기에 할머니의 모든 슬픔과 걱정을 실어서 조용히 띄워 보내세요. 혼자서 그 무거운 짐을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세요. 할머니의 마음이 가벼워져야 비로소 손녀를 안아줄 힘이 생겨요.”
연서는 깃털을 할머니의 손바닥에 올려드렸다. 할머니는 그 가벼운 깃털을
마치 보물처럼 소중하게 감싸 쥐었다.
“할머니의 몸이 아프다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손녀에게 필요한 건 모든 걸 해주는 완벽한 할머니가 아니에요. 존재만으로도, 옆에 있어 주는 따뜻한 마음만으로도 충분해요.”
연서는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할머니의 몸이 되는 데까지만 해 주세요. 밥을 차려줄 힘이 없다면
따뜻한 죽 한 그릇이라도 사다 주세요. 함께 학교에 걸어갈 힘이 없다면
현관에서 잘 다녀오라고 웃어주세요. 할머니가 힘을 내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지금 손녀에게 가장 큰 보호막이 될 거예요.
할머니도, 며느님도, 그리고 손녀도 모두 잘 이겨낼 거예요.”
할머니는 연서의 진심 어린 위로에 눈물을 닦으며 깃털을 꼭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엔 아주 희미하게나마 다시 시작할 용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찻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난 할머니는 아까 병원 문 앞에서 서성일 때와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여전히 깊은 슬픔은 남아 있었지만, 그 슬픔 위에
연서가 건넨 작은 깃털만큼이나 가벼운 희망이 덧입혀진 듯했다.
할머니는 손바닥에 올려진 루야의 깃털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며 말했다.
“고마워요. 선생님 덕분에 내가 이 모든 짐을 혼자 다 짊어질 필요는 없다는 걸 알았어. 그리고… 내 몸이 움직이는 되는 데까지는 우리 손녀 옆에 웃는 얼굴로 있어 줘야겠지.”
연서는 할머니를 문 앞까지 배웅하며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네, 할머니. 할머니의 존재가 아이에게 가장 큰 치료예요. 그리고 힘들 때 언제든 다시 찾아와 주세요. 그 깃털에 남은 슬픔을 또 덜어 드릴게요.”
할머니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 병원 문을 나섰다. 굽은 허리였지만, 그 발걸음은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 보였다.
그녀의 마음속엔 루야의 깃털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듯, 조용한 용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날 진료가 끝난 뒤, 연서는 데스크 정리를 마치고 유리병 속 깃털들을 하나씩 바라보고 있었다. 분홍빛, 초록빛, 회색빛 그 빛들은 하루 동안 사람들의 마음이 지나간 흔적이었다.
그때, 조용히 병원 문이 열렸다. 하진이었다.
평소처럼 말없이 들어왔지만,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그의 손엔 작은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이거… 드릴게요.” 하진은 조심스럽게 봉투를 내밀었다.
연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 안엔 접힌 깃털 하나와 짧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하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연서 샘은… 깃털을 처음 접었을 때 어떤 색이었어요?”
연서는 살짝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저도 회색이었어요. 불안과 외로움이 엉켜 있던 색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루야가 제 마음을 지켜주고 있어서 초록빛, 분홍빛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어요.”
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저도 그렇게 될 수 있겠네요.
요즘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걸 느껴요.”
그건, 하진이 자신의 회복을 인정하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건넨 첫 번째 고백이었다. 창밖 전깃줄 위에 루야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작은 새는 하진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날갯짓을 했다.
그의 날개 끝에서 연분홍빛이 피어올랐고, 그 빛은 저녁 하늘을
조용히 수놓기 시작했다. 그건 사랑과 회복, 그리고 마음이 닿은 흔적이었다. 하늘은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그 아래에서 연서와 하진은 조용히 서로의 마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은 저녁, 연서는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의 피로가 어깨에 내려앉았지만, 그보다 먼저 가방 속 작은 종이봉투가 연서의 마음을 조용히 흔들고 있었다.
그건 하진이 건넨 깃털과 편지였다. 연서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방 안은 고요했고, 창밖엔 가을바람이 살짝 흔들리는 커튼 너머로 스며들었다. 연서는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엔 초록빛과 푸른빛이 어우러진 단정하게 접힌 깃털 하나와 짧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깃털을 손에 올려놓고 편지를 펼쳤다. 하진의 글씨는 조심스럽고 단정했다.
“점점 나아지는 나… 연서 샘 덕분입니다. 물론, 루야도요. 감사합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연서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건 단순한 감사의 말이 아니었다. 그건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였다는 증거였고, 그 마음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고백이었다. 연서는 깃털을 유리병에 넣지 않고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건 오늘 하루의 가장 따뜻한 기억이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고목나무가 조용히 서 있었고 그 위에 루야가 앉아 있었다.
작은 새는 연서의 눈빛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날갯짓을 했다.
그 순간, 연서의 마음에도 분홍빛이 살짝 번졌다. 그건 위로가 닿은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작은 선물이었다. 연서는 속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하진 씨, 고마워요. 당신의 마음이 닿았어요. 그리고… 저도 조금 더 괜찮아졌어요.”
그리고 같은 시각, 하진은 자신의 방 창가에 앉아 있었다.
불 꺼진 방 안엔 휴대폰 화면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는 오늘 연서에게 건넨 편지의 복사본을 다시 꺼내 읽고 있었다.
“점점 나아지는 나… 연서 샘 덕분입니다. 물론, 루야도요. 감사합니다.”
하진은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건 그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건넨 기록이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심의 불빛 너머, 전깃줄 위에 앉은 작은 새가 그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루야… 혹시 연서 샘도 지금 이 깃털을 보고 있을까?”
하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의 마음은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책상 위에 새로운 색종이 하나를 꺼냈다. 이번엔 연한 분홍빛이었다.
하진은 깃털을 접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마음이 닿았기를. 그리고… 그녀의 마음도 조금은 나에게 닿았기를.”
아침 7시. 하진은 알람 없이 눈을 떴다. 창밖으론 흐린 빛이 번지고 있었고, 커튼 사이로 바람이 살짝 스며들었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주전자에 따뜻한 물을 끓였다. 커피 대신, 요즘은 국화차를 마신다. 쓴맛보다 은은한 향이 그의 하루엔 더 잘 어울렸다. 책상 위엔 어젯밤 접어둔 깃털이 놓여 있었다. 회색과 분홍빛이 섞인, 조금은 어설프지만 단정한 모양. 그 옆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늘은, 조용히 살아도 괜찮은 날.” 하진은 그 문장을 한 번 읽고 작은 유리병에 연서에게 써 던 편지도 같이 넣었다. 그건 그 만의 루야였다.
연서에게 받은 위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어가는 중이었다.
하진은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전 진료가 막 시작되던 시간, 접수대 앞에 한 소년이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서 있었다. 소년은 말이 없었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연서는 조심스럽게 눈을 맞췄다.
“안녕. 오늘 조금 긴장 되지?”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말에 어깨가 살짝 움직였다. 연서는 데스크 아래 서랍을 열어 작은 종이학 하나를 꺼내서 소년의 손에 살짝 올려놓았다. 그건 그녀가 짬짬이 접어둔 것들 중 하나였다.
“이건 루야. 감정을 먹고 자라는 새야. 오늘 네 마음을 살짝 맡겨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데스크 위 유리병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건 루의 깃털이야.”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 놀람과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루야는 말하지 않아도 괜찮대. 그냥 네가 어떤 마음인지, 조용히 알아채 줄 거야.”
소년은 종이학을 꼭 쥐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순간, 연서는 또 알았다. 말보다 먼저 닿는 마음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 마음은, 작은 종이학 하나로도 충분히 전해질 수 있다는 걸.
진료가 끝난 뒤, 소년은 다시 접수대 앞에 왔다. 이번엔 혼자서, 그는 종이학을 연서에게 내밀었다. 그 깃털 끝엔, 분홍빛 색연필로 살짝 칠해져 있었다. “루야가 … 오늘은 기분이 좋대요.”
연서는 웃었다. 그 웃음은, 그날 하루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빛이었다.
루야의 깃털은 병원을 방문한 환자들이 마음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치유해주고 있었다. 그건 놀라운 변화였다. 말을 꺼내지 못하던 아이가 깃털을 바라보며 조용히 색을 골랐고, 불안에 떨던 청년은 깃털에 자신의 감정을 적으면 “점점 나아진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깃털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존재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조용히 감사 주었다. 유리병 속에 쌓여가는 깃털들은 단순한 종이 조각이 아니었다. 그건 누군가의 감정이 조용히 피어난 흔적이었다. 그녀는 알았다. 자신이 누군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그건 연서에게 처음으로 느껴보는 작은 행복이었다.
깃털 하나하나를 바라볼 때마다 그 안에 담긴 마음들이 연서의 가슴을 조용히 따뜻하게 적셨다.
그날, 연서는 유리병을 살짝 돌려 햇살이 깃털에 닿도록 했다.
그 빛은 분홍빛, 초록빛, 회색빛으로 조용히 번져가며 병원 안을 감쌌다.
그건 마음이 피어난 색이었다. 그리고 그 색은 연서의 마음에도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