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종종 할아버지의 막걸리 심부름을 했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까만 봉지에 담아 들고 오는 그 길은, 어린 나에게는 단순한 심부름이 아니라 작은 모험이었다.
지금의 막걸리 병은 플라스틱 페트병에 단단한 뚜껑으로 밀봉되어 있지만, 그때의 막걸리 병은 허술했다. 스티로폼 같은 덮개 위에 비닐을 씌워 놓았을 뿐이라 병을 조금만 흔들어도 막걸리가 새어 나오곤 했다. 나는 그 허술함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어린 시절의 풍경을 더 생생하게 만들어 주었다.
어느 날, 동네 구멍가게에서 막걸리 병을 사서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 흔들며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막걸리가 거품이 일며 막걸리가 위로 새어 나왔다. 호기심에 나는 뚜껑 가장자리에 입을 대고 흘러나오는 막걸리를 살짝 맛보았다. 그 순간, 처음 느낀 막걸리의 맛은 시큼하면서도 묘하게 깊은 풍미를 지니고 있었다. 어린 나에게는 낯설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을 끄는 맛이었다.
그 뒤로 막걸리 심부름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병을 위로 들어 조금씩 입에 털어 넣곤 했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그 맛은 심부름의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막걸리가 조금 비어 있어도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으셨다. 아마도 병에서 새어 나간 줄로만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 너그러움 덕분에 나는 오래도록 작은 비밀을 간직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막걸리 심부름은 단순히 술을 사 오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대를 이어주는 작은 의식이었고, 어린 나에게는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막걸리 병에서 흘러나온 몇 방울의 맛은 단순한 술맛이 아니라, 삶의 첫 경험이자 추억의 향기였다.
이제는 구멍가게도, 스티로폼 덮개의 막걸리 병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흔들리는 까만 봉지, 새어 나오던 막걸리, 그리고 그 맛을 처음 알게 된 순간. 그것은 어린 시절의 나를 지금의 나와 이어주는 다리 같은 추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