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영킹 Jun 21. 2020

박나래의 대상은 여성 예능인들의 대상이다.

KBS 다큐인사이트 <개그우먼> 편을 보고-




겉에서 보기에는 우연이거나 한 번 운이 좋아서 있을 일인 것 같을 수도 있지만, 사실 어떠한 현상이 실제로 일어났을 땐 그 뒤의 무수한 맥락과 역사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맥락과 역사 속에는 현재 그 결과를 만들어 낸 장본이 외에도 많은 이들과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러니까, 단순히 /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이란 없다.



2019년 연말, MBC 연예 대상을 박나래 씨가 수상했다. 그는 '나 혼자 산다'의 원년 멤버로서, 초기에 MC로서 중심을 잡았던 전현무 씨가 하차를 하고 나서도 꿋꿋이 프로그램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구해줘 홈즈'에서도 메인 MC가 되는 등 MBC 예능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기에 그의 대상 수상에 많은 사람들은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었다.



하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가 있다. 1990년부터 2018년까지, KBS에서는 1990년 김미화 씨가 '순악질 여사'라는 캐릭터로 대상을 받고 28년 동안 여성 예능인이 단 한 번도 대상을 받은 적이 없었다. MBC에서는 그나마 이경실 씨가 1993-4년 두 번, 박경림 씨가 2001년에 한 번 대상을 탔었고, SBS에서는 2009년 이효리 씨, 2017년 미우새 어머니들 (<- 이것은 논외로 한다..) 뿐이었다.


KBS를 기준으로 보면, 1991년 임하룡 씨, 1992년 이창훈 씨, 1993년 이상해 씨, 1994년 오재미 씨... 2002년 신동엽 씨, 2003년 박준형 씨, 2004년 이혁재 씨, 2005년 유재석 씨, 2006년 김제동 씨, 2007년 탁재훈 씨, 2008-9년 강호동 씨, 2010년 이경규 씨,.. 쭉- 모두 남성 예능인들이 대상을 받았고, 28년 만에 2018년에 이영자 씨가 여성 예능인으로서 대상을 받았던 것이다.



마땅한 여성 예능인이 없지 않았나?!


그동안 '마땅한 여성 예능인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 기억 속에 잊혀진 수많은 여성 예능인들이 존재했다. 박미선, 이경실, 팽현숙, 김지선, 정선희, 박수림, 김현영, 조혜련... 이름만 나열해놓고 봐도 '아, 그 사람~' 하고 생각날만한 인물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대한민국 예능의 역사에서 '비주류'가 될 수밖에 없었을까?



1990년대 후반에는 정통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다양한 포맷의 예능 프로그램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스튜디오 안에서 혹은 게스트들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정리해주는 MC 역할이 출중한 인물들이 필요했었다. 신동엽, 유재석, 김재동,.. 이런 분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게 이러한 예능의 흐름 속이었고, 여성 예능인으로 송은이 씨도 이때 많은 활약을 했었다.


그러다 2000년 중후반부터는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 장르가 들어오면서 무한도전, 1박 2일, 남자의 자격, 나는 남자다.. 남성 중심의 프로그램들이 복제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송은이 씨를 포함한 많은 여성 예능인들에게  설 자리는 아예 없어져버렸다.


즉, 다시 말해 많은 여성 예능인들이 그들의 능력이나 시청자들의 선호와는 상관없이 '방송의 트렌드'에 맞지 않아 선택되지 못했고, 자연스레 잊히거나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0년 차 여성 예능인 이성미 씨는 말한다.



그런 현상은, 시청자가 원한 것인가? 방송국이 원했던 것일까?



이러한 흐름 속에서 실제로 일거리가 떨어져서 몇 달 동안 집에만 있어야만 했던 송은이, 김숙 씨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계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김숙 씨는 '다시는 이 바닥에 돌아오지 않겠다'라고 마음을 먹기까지 했다고.


하지만 송은이 씨는 '방송국이 원하는 거 말고, 우리가 원하는 거 우리 방식대로 해보자'라고 마음먹었고, 그것이 팟캐스트 <비밀보장>이었고, 2015년 시작된 이 방송이 누적 청취 1억 회, 팟캐스트 전체 순위 1위를 달성하게 된다.


방송이 잘 되니 당연히 광고 요청이나 섭외 연락들이 오기 시작하고, 이에 송은이 씨는 이런 일들을 제대로 할 회사가 필요하겠구나-라고 생각하여 '컨탠츠 랩 비보 & 미디어랩 시소'라는 회사를 만들고 대표직을 맡았다.



불과 5년 사이에, 많은 것들이 변했다.



이 모든 변화들이 불과 5년도 안되어서 다 이뤄진 것들이다. 박나래 씨, 안영미 씨가 방송에서 소위 '선을 넘는' 춤을 추거나 몸짓을 해도 이제는 편집되지 않는다. 심지어 박나래 씨는 MBC 연예 대상이라는 결과로 그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이들에게도 안티 팬들이 있을지언정 이들은 대한민국 방송계에서, 예능 트렌드 속에서 '대세'가 되었고, 이 대세는 '변화 그 자체'라는 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송은이, 박나래, 김숙 씨를 두고 여성 예능인들의 역사와 고초를 이야기한다.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거나 새로운 방법을 찾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나래 씨의 대상 뒤에는 앞서 이야기했던 "박미선, 이경실, 팽현숙, 김지선, 정선희, 박수림, 김현영, 조혜련..." 같은 많은 여성 예능인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설령 그들이 지금은 예능 씬을 떠났더라도, 그들의 발걸음으로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가 그나마 다져졌기에, 박나래 씨가 조금이라도 덜 힘을 들이고 (힘이 안 들었을 순 없고) 그 자리까지 갈 수 있었으리라.



박나래의 대상은 여성 예능인들의 대상이다.


그래서 박나래 씨의 대상은 '여성 예능인들의 대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회의 곳곳에는 아직까지도 배출되지 않은 박나래들이 숨어 있다. 그들이 '여성 예능인이어서' 더 유리하다, 불리하다 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더 이상 양성평등에 관해 "논.쟁"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이전까지 역사에서 그래 왔듯, 이러한 변화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며 결국에는 모두에게 꼭 필요하고 유의미한 변화로 이어질 거라 상상해본다.



* 이 글은 KBS의 다큐인사이트 <개그우먼> 편을 보고 정리한 내용입니다. 다시 보기: https://bit.ly/2ALVCRR 






매거진의 이전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처음 마켓컬리처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