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처음으로 '배려받는' 대상이 되다.
5월이 끝났다. 나의 5월 키워드는 '배려'였다. 살면서 처음으로 '배려받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왜 배려를 받냐고? '임산부'로서의 삶을 살고 있으니까 그렇다.
임신 전에는 출퇴근할 때 운전을 했다. 초기에는 특히나 염려되었는지 남편이 운전을 반대해서 최근에는 전철+버스를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고 있다. 그래도 전철 타는 구간이 3 정거장 밖에 안 되어서 다닐만하다.
다만 퇴근길에는 임산부 배지를 달고 있어도 임산부 배려석에 항상 사람이 앉아 있어서 못 앉아 가는 날이 많다. 어차피 금방 내릴 거니까 그러려니 하고 다니는 편이지만.
오늘도 집에 가려고 전철을 탔는데 어떤 아주머니께서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졸고 있었다. (아주머니라 함은, 가임기는 넘겨 보이는 - 다만 할머니까지는 아닌 - 우리 엄마 또래? 정도를 말한다.) 나야 뭐 금방 내리니까 그냥 서서 가야지 싶어 문 앞에서 폰을 보고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한 정거장이 지난 뒤 바로 내릴 준비를 하셨다. 그러자 그 앞에 서 있던 한 청년이 나를 툭툭 치며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나도 두 정거장이면 내릴 거라 앉기 살짝 민망하지만 내가 안 앉으면 그 청년도 민망해질 수 있으니 잠깐이라도 엉덩이를 붙였다. (실제로 배가 좀 뭉쳐서 서 있기 힘들기도 했다.)
이외에도 종종 자리를 양보해주시는 분들을 만났다. 어느 주말에 남편과 외출하는데 한 정거장 거리라서 서 있었더니 어떤 아저씨께서 (내 또래의 딸이 있을 법한 나이시긴 했다.) 나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며 여기 앉으라고 막 손짓을 하셨다. 빈말이 아니고 진짜 한 정거장 갈 거여서 곧 내린다고 괜찮다고 했는데 남편도 나도 넘 감사해서 내리고 나서도 한참 아저씨 이야기를 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은 배려를 해오기만 했지, 받는 입장은 거의 되본적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요새 '배려'라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배려는 의무가 아니니까, 남한테 강요할 순 없다. 하지만 막상 배려를 받는 입장이 되어보니, 왜 배려를 받아야 하는지, 이유는 알겠더라.
임산부 같은 경우는 임신 초기면 초기라서, 중기면 중기라서, 말기면 말기라서 힘든 점들이 있다.
임신 초기는 보통 입덧이 너무 심해져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입덧이 심해진다는 건 뭘 먹었을 때 토할 것 같은 상황이나, 가만있어도 술 마신 다음 날처럼 울렁거리는 증상을 뜻하기도 하지만, 엄청나게 후각이 예민해지는 변화도 있을 수 있다.
나는 뭘 못 먹을 정도로 입덧이 심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후각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편에 속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마스크를 두 개 꼈는데 옆 사람의 숨 냄새도 느껴질 정도로.. ^_ㅜ;; 무슨 입덧 증상이든 하여간 사람 많은 곳에서는 최대한 앉고 싶어질 수밖에 없는 게 임신 초기 때다.
그리고 중기로 넘어가면, 임신 중기가 임신 과정 전체 중에 가장 컨디션이 좋을 때라고는 하지만, 이미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이기도 하고, 배가 뭉치는 현상이 생기기도 해서 걸음도 느려지고 움직이는 게 점점 쉽지 않아 진다. (지금의 나..ㅋㅋ)
임신 말기야 뭐, 말할 것도 없이.. 배가 그렇게 부르면 밖에 나오는 과정부터가 힘들었을 텐데.. 대중교통? 말해 뭐하겠나..ㅎㅎ
하튼 대표적인 증상들만 몇 가지 이야기했지만, 임신을 하고 나서 임산부들의 다양한 케이스를 보니 임신 후 신체 변화는 100명의 임산부가 있으면 100가지가 넘게 있더라. 즉, 배려를 받아야 하는 이유도 100가지 이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임산부를 대표해서 말씀드립니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할 순 없다. 임산부 배려석은 결국 '배려'석 아닌가.
하지만 적어도 임산부 배려석에 누군가 앉아 있는 상황에서 임산부가 같은 칸에 탔다면, 앉아있는 사람에게 눈치를 주거나, 임산부 배려석이 비었을 때 임산부에게 얼른 앉으라고 이야기해주는 정도만 해줘도.. 진짜 임산부 입장에서는 대단히 고맙다.
솔직히 배려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고, 당사자이긴 해도 '제가 좀 앉아도 될까요?'라고 이야기하는 게 쉽지 않기도 하다. 세상이 워낙 험하기도 하고, 괜히 말 꺼냈다 무시당하면 기분도 나쁘고, 안 좋은 경험 몇 번 하면 '에이, 내가 참고 말지'하면서 단념하는 쪽을 선택하기도 하니까..
그래도 배려를 받으면, 임산부 입장에서는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 그날에 있었던 일을 자랑하고 싶을 만큼 고마운 것은 사실이다.
'굳이' 배려하지 않으려면 그러지 않아도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하지만 매려를 해보기도 하고 받아보기도 하니, 배려를 할까 말까 하는 상황이라면 주변에 구체적인 대상이 있을 때, 당사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을 때, 배려를 하는 쪽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더라. 예를 들어 가족이나 친구 중에 임산부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을 떠올리며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는 것이다.
쌩판 남이지만 주변 사람들을 떠올리며 배려하는 쪽을 선택한 순간, 본인도, 배려받는 사람도 조금 더 따듯하게 하루가 기억되지 않을까.
이렇게 나의 5월은 하루하루 작은 배려가 쌓이며 마무리됐다. 이 글을 보는 많은 분들도 작은 배려를 쌓으며 더 따뜻한 6월이 되시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