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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몽드 Jan 30. 2020

잉크가 나오지 않는 볼펜

[마음챙김|Mindful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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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내 인생의 볼펜이다'

  저는 필기구를 좋아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각종 볼펜, 젤 펜, 사인펜, 형광펜, 색연필, 샤프를 사는 일을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학창 시절에 노트필기를 많이 하니 저절로 좀 더 잘 써지는 볼펜을 찾고, 시각적으로 멋진 필기를 하고 싶게 되기 마련입니다. 

  재밌는 것은 고등학교 때 그렇게 아끼고 좋아하던 볼펜을 대학교에 가서 쓰려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환경이 바뀌는 만큼 새로운 도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대학교 1학년 때는 까만색 모나미 볼펜에 꽂혀 모나미 하나만 들고 다녔습니다. 2학년 때는 삼색 볼펜만 쓰고, 미국 교환학생 가서는 미국 볼펜을 수집하고, 대학원 들어와서는 다시 알록달록한 형광펜이 필통에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제 잘 정돈된 노트 필기를 하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대신 매일 일기와 독서 노트를 쓰다 보니 오른손에 다시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Z 브랜드의 0.7mm 검은 볼펜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적당한 심 두께, 진한 색감, 부드럽게 잘 써지고 번지지 않는, 잉크 똥이 뭉쳐 나오지 않고 그립감이 좋은. '이게 내 인생의 볼펜이다'라는 착각을 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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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

  문제는 Z볼펜이 일명 '뽑기 운'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얼마 쓰지 않았는데 글씨가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살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10분 동안 계속 원을 그리고, 드라이기에 열을 가해 뜨겁게 만들고, 펜심에 샤프심을 밀어 넣어보면서 심폐소생을 했습니다. '제발 다시 나와라'라는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탐탁지 않은 마음으로, 집에 있던 다른 볼펜 X를 집어 들었습니다. 나름 Z와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과거 Z에 대한 미련과 집착은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 필사를 하면서 필사하는 문장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X는 별로야'라는 마음이 떠오르고, 저도 모르게 온라인 쇼핑몰에서 Z볼펜을 검색하고 있었습니다. Z가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Z를 꺼내(심지어 버리지도 못했지요) 한번 쓱 써보고, '역시 안되네'라고 실망합니다.

Z(위)와 X(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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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보냄과 자유로움

  구겨진 마음으로, 닫힌 생각으로 X를 손에 쥐고 필사를 하다가, 잠시 멈추고 Z에 집착하는 제 마음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음챙김 명상을 할 때 나를 바라보듯이요. '나는 Z를 좋아하는구나', 'Z는 참 잘 만든 펜이야', 'X도 괜찮아', '지금 내게는 X가 있지'. 그리고 이 모든 마음을, let it go. 떠나보냅니다. 잉크가 나오지 않는 Z에 대한 미련, 잉크가 잘 나오는 X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

  한 편으로는 이런 떠나보내기,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 허무함, 공허함이라는 감정과 함께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내가 뭣하러 이렇게 볼펜을 샀나', '아무 소용없다'와 같이 제 모습과 행동에 덧없음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덧없음과 허무함이 마음을 지배하도록 두기보다는, 대신 제 자신을 이해하고 알게 되는 명확한 순간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내 모습을 새롭게 인식하고, 호기심과 넓은 마음으로 지금 내 모습과 순간을 알아차리는 방향으로요. 


  그리고 마침 필사하던 문장이 '알아차림'이 가져오는 넓고 가벼운, 자유로움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되고 나자,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유별나지나 않은가 하는 의문을 품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자유로웠다." 

                                                                                             - 폴 오스터, <뉴욕 3부작> 중 -



마지막으로 Z로 그린 알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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