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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May 03. 2020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장악할 수 없는 무소속의 순간들

아침 산책. 또 꽃들을 들여다본다.
꽃들이 시들 때를 근심한다면 이토록 철없이 만개할 수 있을까.



책이 풍기는 특유의 차분함에 이끌려 몇 번을 들었다 놨다 고민을 했었다. 좋은 책을 발견했을 때, 되려 그 만남을 미뤄버리는 버릇이 있다. 그 책이 내게 정말로 필요한 순간에야 사서 읽겠다는 생각. 그래야 책이 주는 감정을 온전히 경험하며 책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믿음. 그렇게 미루고 미루던 <아침의 피아노>가 어느 날에서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을 보니, 그 날의 나는 어떤 변화에도 휩쓸리지 않고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는 태도와 자세가 절실했나 보다. 짧은 기록들이 건드리는 감정의 크기는 생각보다 컸고, 나는 긴 호흡으로 산책을 하듯 서서히 책을 읽어나갔다.





분노와 절망은 거꾸로 잡은 칼이다. 그것은 나를 상처 낼뿐이다.



저자 김진영 선생은 암 선고 직후부터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아침의 피아노>를 써 내려갔다. 이 책은 투병 생활 중 그의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을 지나간 작은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의 기록 속에는 다가오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두려움과 남겨진 것들에 대한 미련, 존재로서의 우아함과 처절한 삶의 의지가 공존한다. 임종 직전까지 꾸준하게 이어지는 성찰적 글들을 읽으며 나는 그의 신체는 점점 소멸되고 있지만, 그라는 존재의 가치는 더 선명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의 기록을 통해 사랑에 무척 소홀했던, 나의 존재와 의무를 망각하며 지내온 시간들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



사이사이 지나가는 천진하고 충만한 순간들이 있다. 시간이 흐르고 생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그래서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중립의 시간이 있다. 그 어떤 불행의 현실도 이 불연속적 순간들, 무소속의 순간들, 뉘앙스의 순간들을 장악할 수 없고 정복할 수 없다. 그래서 불행의 현실들 속에서도 생은 늘 자유와 기쁨의 빛으로 빛난다.



사이사이 지나가는 천진하고 충만한 순간. 나를 둘러싼 불행의 현실 속에서도 그 어떠한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순간들이 분명 존재한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걷는 아침 출근길, 업무 중 잠시 고개를 돌렸을 때 보이는 창밖의 작은 숲, 누군가의 따뜻한 배려의 흔적. 그 어떤 불행도 불연속적 순간들, 무소속의 순간들, 뉘앙스의 순간들을 장악할 수 없다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깜깜한 동굴 같은 나날들 속에도 늘 작은 틈은 존재한다. 따스한 빛이 스며들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는 작은 틈.



아침. 다시 다가온 하루. 또 힘든 일들도 많으리라. 그러나 다시 도래한 하루는 얼마나 숭고한가. 오늘 하루를 정중하게 환대하기.



마지막 페이지를 지나며,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오늘 나는 몇 번의 아름다움을 목격했는가, 그리고 몇 번의 아름다움을 스쳤는가.



삶은 향연이다. 너는 초대받은 손님이다.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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