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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Apr 11. 2022

러시아가 우리의 미래가 되지 않으려면

러시아 건축과 러시아 공공주택 이야기

타이밍이란 게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작년 러시아 출장을 다녀온 후 인스타그램에 쓴 글을 약간의 살만 덧붙인 '가벼운' 글을 쓰려고 했었는데, 킵만 해놓던 몇 달 사이에 추억에 젖은 그저 그런 감성글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우크라이나는 뭐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 국민들 또한 엄연한 피해자이기 때문에 평화롭던(아니, 평화로워 보였던) 러시아를 추억하는 것조차 사치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왕 쓰기로 했으니 더 늦기 전에 펜(아니 키보드)을 들어본다(쳐본다).





한창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작년(확진자 수는 지금이 더 많은 아이러니), 러시아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그때는 한국에 갇혀 있는다고만 생각했던지라 간만의 비행에다 코시국의 해외 외출에 들떠 회사까지 그만두고 러시아로 떠났다(?! 사실은 퇴사와 우연히 맞물렸다). 유럽 신봉자였던 내가 가장 좋아하던 유럽은 남을 신경 쓰지 않는 '개인주의'와 나를 전공으로 이끌어준 '건축' 때문이었다. 한국과 프랑스, 너무나도 다른 도시 풍경 사이에서 적응하기 어려웠던 나는 오래간만에 만나게 될 서양식 건축 경관을 몹시 기대했다. 공항 그 자체가 주는 설렘이야 말할 것도 없고



모스크바 공항 착륙하기 전 상공에서 보이는 건물


처음 나를 반겨주던 러시아 건축물. 상공에서도 보이는 엄청난 크기의 건축물이 위압감을 준다. 멀리서 봐서 무엇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왠지 아파트 같은 주거공간인 듯했다. 이 건물을 보니 지도교수 수업 시간이 생각났다. 건축사 전공이었던 교수님의 수업은 '19&20세기 서양 건축 역사'였고 수업 중간쯤에 러시아 스탈린 건축에 대해 언급을 했었다. 내용은 다 잊어버렸더라도 그때 봤던 거대한 러시아 건축의 강렬한 이미지는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던 덕분인지, 상공에서 본 정체불명의 건물을 보니 수업이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모스크바까지 9시간, 대기, 그리고 또 국내선 4시간... 등등 건물보다 먼저 압도적인 땅덩이의 스케일에 질려버렸고, 그렇게 비행기를 타고, 또 차를 몇 시간을 타고 간 지역의 건물과 도시는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가장 인상 깊었던 도시 풍경 중 하나는 바로 프랑스의 HLM 같은 공공주택 건물이었다. 러시아에서 30년이 넘게 사신 현지 코디네이터 분께서 말씀하시길, 러시아는 임금이 매우 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살 수 있는 이유는 물가도 싸고 집이 있어 집세가 나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프랑스에 오래 있다 한국에 와서 당황한 것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그중 하나가 장바구니 물가였는데, 파리의 물가와 집세는 상상을 초월하지만 그래도 장바구니 물가는 한국보다 더 싼 편이다. 외곽에 있는 대형마트가 훨씬 싸지만 그마저도 귀찮아서 항상 집 앞에 있는 (비싼 슈퍼에 속하는) 모노프리에 갔었는데, 그 모노프리에서 장을 보는 것보다 한국의 마트가 더 비쌌다. 아무튼 프랑스보다 훨씬 싼 러시아의 물가에 감동한 순간도 잠시, 또 간만의 서양 건축과의 만남을 잔뜩 기대했던 (도시 미관을 중요시하는) 내가 실망한 순간도 잠시 러시아의 아픈 역사를 들춰본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잘 나가던 소련 때 대량으로 찍어내서 무상 공급하던 그 공공주택을 그저 흉물스럽다고 욕할 수만은 없었다고 할까. 소련이 붕괴한 후 몇십 년 동안 방치되어 케어를 못 받고, 이제는 그저 비를 피할 지붕이 있고, 그 아래에서 잠자는 곳이라는 기능 정도만 남은 건물들. 이 공공주택에서 냉전 시대 미국과 양대 산맥이었던 소련이 해체된 뒤 러시아 제국보다 더 후퇴한 러시아의 현재를 본 것 같아 씁쓸했다.


  

하필 비가 와서 더 을씨년스럽게 보이는 러시아(더 정확히 말하면 알타이 공화국)의 주택들






물론 모스크바는 달랐다. 모스크바는 역시 유럽이자 러시아의 수도답게 나의 눈을 즐겁게 하는 아름다운 건물들이 즐비했다. 뿐만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알타이의 공공주택과는 또 다른 사회주의 건축의 이면을 볼 수가 있었다. 일단 땅덩이만큼 웅장한 건물 스케일이 그것. 비행기에서도 큰 위용을 자랑할 정도니 그 웅장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알타이에서 시무룩했던 서양 건축 덕후는 간만에 본 서양식 건물들에 눈이 돌아갔지만,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번영과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건축물에 담아 과시하고자 했던 의도성이 엿보여 또 마냥 멋지다고만 할 수도 없었다.


표토르 대제 동상이었나? 동상 스케일 ㅎㄷㄷ



아래 두 개의 건물은 영국의 세븐 시스터즈도 아니고 스탈린의 7자매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의 건물로, 자유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뉴욕의 고층 빌딩들(a.k.a.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견제하기 위해지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두 번째는 까질니체스키 강변아파트. 또 캠퍼스 덕후이기도 한 나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캠퍼스에 꽂혀 러시아 건축을 공부하고 러시아에서 박사를 할까, 하는 헛된 망상을 잠깐 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노문과에 모스크바 국립대학 출신 선생님들이 있었는데 다들 저곳에서 공부하셨던 걸까?! 아무튼 이렇게 모스크바의 건물의 겉모습은 화려해 보이지만 안에는 심각한 노후화가 진행된 것들이 많다고 한다. 모스크바에는 신식의 아름다운 주거지들이 늘어서 있고, 계속해서 새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까질니체스키 강변아파트



처음 이 글의 모티브가 된 글을 쓴 게 출장을 갔다 온 직후인 작년 여름, 브런치에 글을 쓰기로 결정한 게 3월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전쟁이지만 왜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냐면, 러시아에서 받은 느낌과 또 이 글을 쓰게 된 이유가 한국에서 집을 구하는 과정이 너무 어려웠는데, 고생했던 게 생각나서 더 울컥했기 때문이었다. '의식주'는 인간 생활의 기본 요소로 사실 인간 생활의 기본이라고 운운할 필요도 없이 누구나 내가 살 집을 갖고 싶은 건 당연한 욕구이며 꿈이다. 그것도 새 집, 그리고 좋은 집으로. 싼 가격에(게다가 무상으로) 누구나 평등하게 내 집을 소유할 수 있는 이상주의(어차피 사적 소유도 금지였지만)에서 출발한 소련의 유토피아 같은 주택 정책은 흉물스러운 도시 풍경이라는 결과로 남아버렸다. 하지만 30여 년 전에 이미 망해버렸다고 증명된 정책, 심지어 평등하지도 않은 공공주택 정책이 억제와 규제라는 이름으로 21세기에 부활하여 내 집 마련의 꿈을 앗아가 버렸다. 꼭 이런 인과관계가 다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제는 내 집 마련의 꿈을 꾸는 모든 이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추가된 감상. 


러시아 전쟁에 반대하여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하기로 한 글로벌 기업들 때문에 마지막 빅맥을 맛보기 위해 모스크바 시민들은 모스크바의 맥도널드 매장에서 수백 미터 줄을 섰다는 기사를 보았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모스크바에는 러시아 제국과 소련 시대의 위상을 뽐내는 대규모의 건축물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모스크바의 그 유명한 붉은 광장에 있는 굼 백화점은 서유럽의 건물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화려함과 호화스러움을 자랑한다. 그러나 아무리 백화점 홈페이지에서 굼은 '단지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매장이 아닌 [...] 건축의 기념물이자 [...] 모스크바의 상징'이라고 생색낸다 하여도, 소련 이후 민영화된 백화점의 대부분을 차지한 글로벌 기업의 매장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과연 백화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겉은 휘황찬란하지만 백화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텅 비어버린 굼 백화점, 사람은 살고 있지만 아주 기본적인 주거의 기능도 겨우 수행하며 흉물스럽게 남아 있는 소련의 공공주택, 그리고 소련 개방을 상징하는 맥도널드의 러시아 철수까지. 이런 러시아의 모순적인 풍경은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또다시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굼 백화점




백화점 안의 한 카페. 흑인 급사?가 샹들리에를 머리에 이고 있다. 제국주의적 시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조명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굼 백화점이 있는 붉은 광장. 극성수기인데도 코로나 때문인지 사람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소련 공공주택에 대해 참고하기 위해 읽은 자료. 읽어보면 좋을 기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054253#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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