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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주영 Jan 27. 2021

영감들이 사는 세상


영감들이 주인공인 소설이 좋다. 세상 다 산 것 같은 영감들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은퇴 이후에는 어떻게 살게 될 것인가’ ‘늙으면 어떤 재미가 있을까’ ‘죽기 직전에는 어떤 기분일까’ 에 대해 가끔 아니 자주 생각하는 나는 이러한 소설을 통해 나에게도 찾아올 시간을 그려보곤 한다.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죽어가는 짐승’ 두 권 모두 곧 죽을 혹은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1인칭 혹은 3인칭 시점으로 주인공에 대한 삶을 되짚는데, 앞 부분엔 성장 과정 그리고 젊은 시절 영광의 순간들이 표현된다. 주인공들의 과거 화려한 삶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사회적인 성공과 인정과 함께 빠지지 않는 것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을 얼마나 쉽게 자주 만났는가, 그리고 얼마나 즐겼는가에 대한 묘사이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스텐트를 삽입한 심장을 갖게 되었고, 좋아하는 젊은 여성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아직도 마음은 젊은 여자를 쫓는) 칠십 먹은 노인이 되었다. 이렇게 다 놀고 다 산 영감들은 자신들의 욕망이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체력과 기운이 없다. 그저 갈등의 기억과 회한만이 남은 주인공들의 과거의 사건들은 다분히 소설스러울지라도 그것들을 정리하는 문장들은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한번쯤 경험했을 감정, 상황들을 노년의 시선으로 명쾌하게 정리해준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에브리맨>, p86


거짓말은 정말 경멸스러운 방식으로 값싸게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거야.
다른 사람이 불완전한 정보에 따라 행동하는 걸 지켜보는 거야.
<에브리맨>, p127



그리고 저 멀리 있는 것 같기만 했던 늙음, 죽음이 바로 건너건너 어딘가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함으로 뭣도 모르고 노년을 맞는 게 아니라 예방주사를 맞았으니 견딜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그는 세 번 결혼을 했고, 애인들과 자식들과 성공을 안겨준 흥미로운 일자리를 가졌지만, 이제 죽음을 피하는 것이 그의 삶에서 중심적인 일이 되었고, 육체의 쇠퇴가 그의 이야기의 전부가 되었다.
<에브리맨>, p76




물론 이렇게 극 사실적인 문장들만 있다면 늙는 것이 두려워 미리 죽어버리고 싶을 수도 있겠으나, 아름다운 노년의 이야기도 있다. 여기에는 뜨겁지 않아도 은근한 사랑이 있고, 인생을 대하는 여유가 있다. 폴 오스터 ‘브루클린 풍자극’에서 폭풍 같이 휘몰아치는 젊은 날을 보낸 주인공이 마지막에 다시 한번 사랑을 찾고 그 감정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읽을라치면 (물론 내가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영감들의 겉모습을 떠올리면 상상이 잘 되지는 않지만) 이들도 나름의 사랑을 하는가 보구나 싶어 흐뭇해진다. 그리고 나 또한 60대에 이런 사랑을 해볼 수 있다면 하고 기대하게도 된다. 내가 설사 누군가와 (혹은 남편과 다시 한번)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더라도 이렇게 고운 표현은 할 수 없겠지만 그 마음은 얼마나 따뜻할 것인가. 함께하는 노년은 또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다.



조이스와 나는 삶의 막바지에 이른 것은 아니었지만 인생의 봄날이 저만치 뒤로 물러갔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은 인생의 황혼기, 계절로 치자면 10월 중순이나 말경에 이르러 있었다. 머리 위로는 맑고 푸른 하늘이 걸려 있지만 대기 중에는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그리고 나뭇가지에는 할 수 있는 한 오래 바깥에 머물고 싶게 만드는, 대부분 갈색으로 바뀌기는 했어도 아직까지는 황금색, 붉은색, 노란색으로 물든 수천 수만의 잎사귀가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브루클린 풍자극>, p352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 둘 사이에 공통점이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그렇지만 인간의 삶에서 이 <그렇지만> 보다 더 불가사의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또 있을까? 우리는 천생연분인 것처럼 서로 잘 맞았다.
<브루클린 풍자극>, p354






마흔 여덟 이혼남의 솔로 라이프 이야기이지만 주변 어른들의 모습을 담담히 바라보는 마쓰이에 마사시의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에서는 노년에 이르기 전 중년의 또 다른 현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주인공은 이혼 후 새로운 집을 마련하여 정성껏 꾸미고 혼자만의 삶을 시작한다. 그러다 예전 애인과 우연히 재회하여 연인과 부부 중간쯤의 관계랄까 어른들의 사랑답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내는데 애인 아버지의 건강 상태가 나빠지는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생각도 조금씩 변하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 한 달에 한번씩 병원을 찾아야만 했던 에브리맨의 ‘그’도 사실은 항상 느꼈을 그 심심함, 적막함이 소설 속의 주된 분위기다. 주인공은 소설 속 말처럼 우아해 보인다. 그러나 실은 외롭고 고고한 삶을 살아가는데, 결국 누구나 마지막엔 혼자 살아질 시간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문장들이 있다.



눈치 볼 필요가 없다. 방귀도 마음껏 뀔 수 있다. 다만 아무 저항도 없이 시간이 스르스르 지나가는 것은 정말이지 심심하다. 외롭다면 외롭다. 하지만 이 심심함에도 차츰 익숙해졌다.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p12



나이를 먹었다고 주변을 정리하고 예금 통장이랑 눈싸움을 벌이면서 겁내며 살면 재미없죠. 이 집도 당신이 손을 봐줘서 이렇게 밝고 쾌적하게 되살아났잖아요. 비용 때문에 벌벌 떨지 않고 관리를 제대로 해주는 게 중요한 일이에요. 늙었다고 한탄해봤자 뭐가 되겠어요.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p250




영감들의 소설을 읽는 것은, 언젠가 가게 될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무섭고 두렵고 외롭겠지만 어쩔 수 없이 나도 가야 할 곳.

하지만 함께 가면 그럭저럭 지낼 만 한 곳.


여전히 노년과 죽음은 막연하지만 소설을 통해 쓸쓸함, 외로움, 무기력함을 미리 접한다. 그리고 소설 속 화자들에겐 많이 남아있지 않아 애달프고 안타까운 것들이 아직 내겐 좀 더 많이 남아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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