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뱅이 필독서
제주 여행 중 우연히 들른 만춘서점에서
이 책을 덜컥 구매한 나를 칭찬하면서...
- 주정뱅이라면 강력 추천합니다.
- 이제 그만 술과 이별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추천하고요,
- 사람들은 대체 왜 술을 마실까에 대해 궁금한 사람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ㅎㅎ
제주 여행 중에 들른 독립책방에서 골라든 책이다.
평소에 안 읽을 책, 몰라서 못 읽을 책, 읽어야 할 책 우선순위에 들지 않을 것 같은 책을 선택했다.
그 선택은 완벽했다.
#영롱보다몽롱
12명의 시인이 술 대해 이야기한다. 덮어놓고 술을 예찬하는 책은 아니다. 누구는 술을 극찬하고, 누구는 술을 멀리한다. 또 누구는 술이 익어가는 것에 대한 의미를 이야기하고, 또 누구는 함께 먹은 안주와 함께 마신 사람을 이야기한다. 다양한 술에 대한 이야기에서 어느 한 부분씩은 내 이야기라 자연스레 이입했다.
내 사십여 년의 인생에서 술을 완전히 들어내면 무엇이 남을까. 재미있는 일은 삼분의 일로 줄 것이고, 사건사고도 십 분의 일쯤 줄 것이다. 또한 내 입으로 들어간 액체의 사분의 일쯤은 술일테니. 술을 완전히 도려내면 나를 말할 수가 없을 수도. 그럼에도 난 간혹 술을 안 마시는 미래, 노년을 상상하곤 한다. 술이 없어도 완전히 즐거운 나의 모습. 그게 진짜 오롯한 행복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지만, 매주 금요일마다 남편과 둘이 마시는 맥주가 주는 홀가분함을 놓지 못하겠으니 그 미래를 계속해서 조금씩 뒤로 미루고 있다.
열 두 개의 글 가운데 가장 공감이 크고 마음을 울렸던 것은, 첫 번째 글은
허은실 시인의 <언니와 함께 술을>
함께 술을 마신 언니들을 추억한다. 글은 대체로 내내 쓸쓸했지만, 언니들의 인생과 술이 엮이는 대목에 울림이 많았다.
귤꽃이 피거나 무화가가 여무는 밤, 국수 한 그릇에 막걸리 한 병 마시고 딸과 조잘조잘 돌아오는 길을 좋아한다. 은근한 취기가 달빛에 섞이고 봄밤의 수더분한 공기 속에 달콤한 귤꽃 향기가 번지면 '지금 어째 좀 행복한 것 같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인데, 그런 순간의 그 머쓱한 행복감을 사랑한다.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 취기 어린 봄밤을 애틋이 떠올린 것 같은...
그리고 무엇보다 빈 위장을 찌르르 핥으며 내려가는 알코올의 느낌을 나는 좋아한다. 그 강렬한 실존의 감각. 생각해 보라, 우리가 내장기관을 감각할 때가 살면서 얼마나 있는가. 이슬처럼 사라질 인생. 한잔 술의 즐거움도 내쳐 버리면, 서글프지 않은가. 31p.
한은형 시인의 <다자이 오사무처럼 마시기>도 매우 흥미로웠다.
무기력했던 다자이 오사무에게 술이 주었던 즐거움. 그에게 술을 선물했던 마루야마의 이야기도 재밌었고, 작가 자신이 대취한 적이 없다고, 망가진 적이 없다고 아쉬워하는 장면은 정말 나와 같았다. 술을 좋아하지만 술 앞에서 매번 어정쩡했고, 술과 관련된 이벤트에 나는 주로 목격자였지 주인공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술에든 사람에든 화르륵 타오르지 못한다. 그러니 술을 마셔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취한 사람 수발이나 하고 있다. 어정쩡하게. (...) 술을 마시고 손을 잡은 적도 있고, 입을 맞춘 적도 있다. 충분하지 못했다. 75p.
문정희 시인님의 글에서 인용된 술에 관한 시들은 멋있고, 슬펐으며,
한때 자신도 술을 마셨으나, 이제는 술을 멀리한다는 이다혜 시인의 <금주의 조용한 지지자>도 좋았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못 버틸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란다. 술이 아무리 우습고 즐거운 기억을 많이 만들어 줬다 해도, 술이 만들 수 있는 우울하고 슬픈 기억을 압도할 만큼이 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술의 힘을 빌지 않고도 용기를 내기. 술을 마시지 않고도 내게 중요한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리고 밤잠을 푹 자기. 나이 들어가는 내가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다. 121p.
이다혜 시인보다 술에 대해 더 강경한 입장을 밝힌 박소란 시인의 글 <취하지 않는다>도 있었다. 술 없이는 하지 못할 말을 내뱉고,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을 하고 술 때문에 그랬다는 핑계를 댈 수 있는 관대한 사회를 꼬집으며, 작가 개인적으로 불편했던 에피소드들에 정면으로 불편감을 내비치는 이 솔직한 글이 좋았다. 단단하고 단호하면서도 외로워 보였다. 이 글을 읽고 박소란 작가를 찾아보기도 했다. 이 분의 글을 다른 곳에서도 보고 싶어졌다.
세상은 맨 정신보다 술과 취기에 관대한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럴 의향이 전혀 없다. 셀 수 없이 많은 모욕을 술잔을 앞에 둔 체 겪어 왔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관대함은커녕 새삼 거센 적의가 솟구친다. 202p.
친구,라고 부를 만한 인간도 차츰 줄어 버려서. 그리고 무엇보다 '안전한', '무해한'이란 것이 세상에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생활이 지속되는 한 언제든 어디서든 상처 받고 상처 입힐 수밖에. 그리고 그런 일은 가까운 거리에서 훨씬 빈번하다. 물론, 알고 있다. 이 모든 결과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을. 205p.
이런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는 것은, 내가 지금 이렇다는 뜻. 이 글을 읽던 2023년 2월의 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정말 믿을만한, 안전한 것이 있을까? 누구나 자신의 욕심이나 목적이 앞서기 마련이므로 친구는 되도록 개인의 욕망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했던 것 같다. 회사생활과 엮이지 않으며, 생활 반경이 좀 멀더라도, 자주 많나지 않더라도, 그저 멀리서 응원과 위로를 주고받는 것이 오래도록 영원하지 않을까 하는.
술에 대한 다양한 예찬과 습관에 대한 글들도 좋아서 많이 밑줄을 그었다,
"인생은 꽃, 술은 그 꽃의 꿀"이라는 문장처럼, 식물들이 베푸는 취기의 세계는 참으로 달콤하고 풍부하다. (...) 술을 마신다는 것은 병 속에 담긴 오랜 시간을 함께 음미하는 일이다. 진정한 술꾼은 병 속의 어둠에서 익어 가는 것들을 상상하고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병이 열린 뒤에는 술이 스스로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때까지 천천히 그 맛과 향기를 음미하는 사람이다. 169p. <병 속의 어둠에서 익어가는 것들> #나희덕
생각을 집중하거나 각성할 필요가 있을 때는 커피를 마시고, 생각을 식히거나 내려놓고 싶을 때는 와인을 마신다. 어느 쪽으로든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몸과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는 내 나람의 방법이다. 172p.
어쩌다 기분 좋게 마신 날이면 나는 거기가 어디든 일단 집까지 걷고 보는 습관이 있다. 가다가 지치면 택시를 타면 된다, 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대체로 그대로 걸어 목적지까지 무사히 닿곤 했다. 평소 걷는 걸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실은 더 오래 간직하려고. 오늘의 추억을 소중한 이의 표정과 목소리, 우리가 주고받은 모든 이야기들을 오래오래 잊지 않으려고. 211p.
술과 친할 적에는 낮술을 즐겼다. 아직 해가 떠 있을 때, 조금씩 홀짝이는 술, 그러다가 가게 밖으로 나와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헤어질 때, 아직 하루가 이만큼이나 남아 있음에 기분 좋아졌다.
271p. <시 쓰는 마음, 술 마시는 마음> 강혜빈.
술로부터 멀어진 지금, 술의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본다. 투명한 병, 입구 속에 눈을 집어넣고. 그 속에는 미묘하고 달콤하게 찰랑이는 세계가 있다. 종종 자신의 생각을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것은 알아차리기 어려운 권위와 권력을 가지게 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세계 안에 매몰되어 있으면 바깥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은 내가 될 수 없듯이. 277p
#허은실 #백세희 #한은형 #문정희 #이다혜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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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