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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soh Oct 06. 2019

슬픈 사용설명서

죽음의 에티켓_롤란드 슐츠, 노선정옮김, 스노우폭스북스, 2019

2014년 독일 의회에서 안락사를 법적으로 어떻게 규정할까를 놓고 토론했을 때 저는 여기에 크게 매료되었습니다. 그 논쟁은 의회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감정적이고도 개인적이었고 정당들 사이에 있던 일반적인 경계를 넘어 국회의원들 모두 솔직하게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위대한 순간이었죠. 2015년 11월 국회의원들이 결정적 투표를 실시할 때까지 언론은 법안에 대한 찬반 의견을 개진하고, TV 토크쇼가 열리고 여론 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모두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죽음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죽음이란 무엇이지?(p.243~p.244)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그는 안락사에 관한 토론을 지켜보다 '죽음'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인간의 호기심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인간의 호기심으로 인해 이 지구 상엔 수많은 호기심의 생산물들이 창조되어 있다. 그 날 그 토론을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한 사람, 롤란드 슐츠만이 '죽음'에 관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숱한 질문들 끝에 결국 이 한 권의 책을 엮게 되었다.


단어가 주는 '슬픔'으로, '공포'로, 우리는 암묵적으로 '죽음'이라는 단어를 내뱉기를 꺼린다. 연일 뉴스를 통해 수많은 죽음을 읽게 되지만, 언제나 그것은 나와는 동떨어진 것이라 믿고 싶다. 내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인 마냥 나와는 상관없다고.


사실 죽음은 너무 멀리 있었습니다. 그건 언제나 다른 사람의 죽음일 뿐, 단 한 번도 당신의 죽음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확실한 죽음을 보지 않고 회피해 왔습니다. 우리 모두가 죽어간다는 사실 말입니다.(p.12)


글자를 읽고 있는데 자꾸만 시야가 흐려졌다.

미련 없는 삶을 살기 위해 하루하루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내 코끝은 왜 자꾸 통증을 느끼는 것인지, 초연한 삶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막상 현실로 다가 올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생각하니 덜컥 겁부터 난다. 사정없이 눈물이 흘러서 결국 책 읽기를 멈춰야 했다.


책은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내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이고 정교하게 알려준다. 어찌 보면 '죽음에 대처하는 설명서'라고 봐도 무방하다.


나는 그 사용 설명서를 보면서 왜 자꾸 울고 있는 것일까?


당신은 이제 자립적이지 않게 됐습니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면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당신이 일생 동안 무엇이었든 간에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일생 동안 맡았던 역할을 내려놓게 합니다. 어떤 것들은 확 빼앗기도 하죠. 잔인하고 가차 없이(p.50)


하루가 다르게 연로해가는 부모님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오랜 노동으로 인해 하나둘씩 기능이 저하되는 몸 상태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린다. 없는 살림에 자식 뒷바라지하고 싶은 일념으로 여전히 노동을 하는 부모님을 보며 '부모에게 자식이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본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부모에 대한 자식 사랑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보니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자식이요, 그들을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부모라고 생각한다.


그런 부모를 바라보는 자식은 어떠할까?


먹는 것 줄이고, 사고 싶은 것 줄여가며 평생을 아끼고 모은 돈으로 아들들 집 장만하는데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다 내어주고는 하루살이가 어렵다 하소연을 한다. 딸자식이 편해서 아쉬운 소리가 자꾸 나온다손 치지만, 이틀이 되고 사흘이 지나면 듣기가 싫어진다.


나 결혼할 때는 돈 한 푼 없으니 너 가진 걸로 알아서 해라, 하던 부모님은 내가 결혼을 하자마자 큰아들에게 집을 사주셨다. 경제적으로 독립하면서부터 그들을 살뜰히 살폈다. 고생하는 부모를 대신해 동생들 뒷바라지며, 부모 봉양이며 기쁘게 하던 것이 살림 밑천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순간이었다. 아들이 제 부모를 잘 섬긴다면 서러운 마음이 좀 사그라들 텐데 그러지 못하다 보니 내 마음은 여전히 응어리가 맺혀있다.


삶에 대한 의지가, 기능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부모를 보며 생각이 많아진다. 결국 내게는 병든 육신만 남겨질 까 싶어 염려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기쁘게 그들을 받아 들 일 수 있을까?


딱 한번 수술대에 누운 것이 아이가 두 살 되던 해였다. 그날은 폐암으로 투병하던 큰엄마가 돌아가시던 날이었다. 나는 장례식장에 발을 들이지 마자 큰엄마께 절 한 번을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응급실로 실려 가서 '급성 복막염'임을 알게 되었다.


전례 없는 함박눈이 내린 것을 보며 사람들은 살아생전 큰엄마의 인품이 눈이 되어 내린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오늘을 슬퍼하는 하늘이 펑펑 눈을 퍼부어주는 것이라 했다. 자식이 없던 큰엄마는 모진 시집살이를 했다. 아들을 둘이나 낳은 엄마와는 평생을 앙숙으로 지내셨다. 눈길을 달려오던 남동생들은 오던 중에 교통사고가 나서 결국 장례식장에는 발조차 들일 수가 없었다.


수술을 진행하지 않으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으며, 남편에게 아이 기저귀를 잘 갈아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큰엄마에 대해 생각했다. 아픈 배를 주려 잡고 6시간을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큰엄마의 보살핌이었을까? 내가 올리는 절을 받고 싶지 않은 것이 큰엄마의 바람이었을까? 나는 왜 하필 그날 맹장이 터졌을까? 무사고 10년을 자랑하던 동생들은 왜 하필 그날 교통사고를 당했던 것일까? 이 모든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수술실로 들어가는 나를 보며 울부짖던 아이의 모습이 눈에 생생하다. 짧았지만 내 숨이 언젠가는 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치던 순간이었다.


모두가 당신의 호흡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당신은 얕은 숨을 쉽니다. 호흡이란 건 사실 굉장한 겁니다. 호흡은 무의식적으로 조절되면서도 의식적으로 조절이 가능한 것이지요. 사는 동안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만 죽음을 앞둔 이에게 그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호흡은 이제 새로운 패턴을 보입니다. 처음에는 깊었다가 얕아지고 그러다 멈추고, 그 상태로 얼마간 숨을 멈추고 있다가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호흡이 시작됩니다. 겨울잠 자는 동물들이 이렇게 숨을 쉰다고 합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인간도요.(p.80)


내가 죽는다 생각을 하니 눈물이 흐른다. 내 죽음을두고 나는 왜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내 죽음과 아이의 모습이 동시에 떠오르던 순간마다 나는 울고 있었다.


연로하신 부모님은 두고 가는 자식이 염려되어 눈물을 흘리게 될까? 평생 자식을 위해 헌신하던 삶이 후회스러워 서글픔의 눈물을 흘릴까? 다리가 아파 병원에 가야 한다던 엄마는 내 당부대로 택시를 타고 가셨을까? 돈 만원 아낀다고 기어이 버스를 타고 가셨을까?   


해마다 정월대보름이 지나면 엄마와 같이 토정비결을 보러 갔다. 몇 해 전 아이의 생시를 넣고 아이의 사주를 보던 분이 '단명'할 사주라는 얘기를 하고는 빠르게 입을 가리셨다. '단명'을 피하려면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돈을 내어놓고는 장수할 이름을 손에 받아 들었다.


'내 아이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를 잃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남의 일이라고 믿으며 산다. 세월호 사건을 보며 마음은 아프지만 내 아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숱하게 했다. 내게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도 가끔 그날의 일이 생각난다. 나보다 먼저 아이를 잃게 된다면 나는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지금 살아가는 이유는 그녀 곁에 머물고 싶은 바람 때문인데, 내 삶의 이유가 없다면 그래도 나는 살아갈 것인가? 살아갈 수 있을까?


그때부터 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정을 어렴풋하게나마 들여다보려 애썼던 것 같다. 어쩌면 내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만약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어떠할까? 우리는 어떠할까? 시간은 흘러가고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질 테지만, 그녀의 빈자리는 여전한데 우리는,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럼에도 살아질까?


그녀의 흔적을 보며, 그녀와 웃고 있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녀를 추억하며 그렇게 살아질까?

그럴 수 있을까?


4월 16일 참사를 기억하지만 남은 자들의 아픔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선명한 빈자리를 감히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사건이 일어났던 날은 4월 16일이라는 것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내 일이 아니기에 단지 날짜로만 그날을 인식하고 있다.


내 일이라면 사정은 어떠할까?

내 일임에도 나는 그날을 날짜로만 인식할 수 있을까?


힘이 든다.

슬픔이 가라앉지 않는다.

책을 읽는다면 이유만으로 나는 너무나 많은 죽음을 들여다보고 있다.


죽음이란 건 완전히 일상적인 과정이고, 그래서 세상에 그보다 더 보편적인 현상도 없습니다. 탄생처럼 죽음의 순간에도 우연히 선택된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p.93)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날이 오늘이 마지막 일수도 있다. 내 아이에게 차려주는 마지막 밥상일 수도 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지금 이 순간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내게도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지만,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도,

어느 것 하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내 죽음이 내 가족에겐 슬픔이지만, 세상 밖으로 나가면 보잘것없는 일에 불과하다. 그 누구도 오랫동안 나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다. 삶이라는 것은.


오늘을 살아내지만 내일은 죽을 수도 있다. 내일이 내게는 특별한 날이 어쩌면 생애 가장 슬픈 날이 될 수 있지만 세상 밖으로 나가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하다. 파리 목숨과 다를 바가 없다.


생애 첫 수술을 하고는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카카오톡 프로필에 링거 사진을 걸어둔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관심 종자였다. 그간 마음을 썼던 친구들에게서 따뜻한 안부 전화를 받고 싶었다. 위로받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단 한통의 위로도 받지 못했다.


그들에게 내 수술은 별일 아니었다. 티끌만 한 기억도 남기지 못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내 일인 양 찾아가며 위로했던 지난날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 걸까? 나는 그들에게서 내 그림자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날을 계기로 조금씩 포기하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안팎으로 애쓰며 살던 날들에서 한 발짝 멀어지기로 했다. 관계에 대해 비로소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내가 애를 쓰고 에너지를 쏟아야 할 대상이 분명해졌다. 나는 그 자명한 사실을 경험을 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관계를 몰살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들과 함께 즐기며 추억하고 있다. 다만, 그들에게 묶어두던 내 그림자를 지웠다. 내 그림자는 내 그늘 안에서만 온전할 수 있도록 내 곁에 묶어두게 되었다.


물을 마실 것 (눈물 때문에 탈수가 되므로)

외출할 것 (바람은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묻지 않으므로, 나무들은 누가 우는지에 관심 없으므로)

움직일 것 (이 모든 빌어먹을 상황에서 달라질 것이 없지만 그래도 운동할 것, 잠시 동안의 산책이라 할지라도, 운동은 진정작용이 있으므로)

샤워할 것 (모든 게 아무 의미가 없는데 왜 몸을 씻고 빨래를 하냐고? 거의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게 정화 작용을 하므로)

먹을 것 (조금이라도, 적어도 죽이라도)

무엇인가를 돌볼 것 (꽃이나 개, 자동차, 무언가를 조금 돌보는 게 도움이 되니까)

조심할 것 (당신들을 위해서나 다른 이들을 위해서, 슬픔의 파도가 높이 솟아오르면 기계를 작동하거나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도로를 빨리 건너는 것은 위험하므로) (p.217)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냈거나, 보내야 하더라도, 지켜야 할 누군가 당신 곁에 있다면 나는, 당신은 위의 요령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야 한다.


떠나간 이의 빈자리를 보며 자주 슬픔이 밀려들겠지만, 지켜야 할 누군가를 위해 나는 당신은 또 살아내야 하므로.


외면하고 싶지만, 피해 갈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처음부터 유한했으므로, 주어진 삶에서 어제만큼 지나왔고 앞으로 얼마가 더 남아 있다고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으므로.


내 '죽음'에 대해, 부모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아이의 '죽음'에 대해 들여다보아야 한다. 내가 먼저 떠나간다면 남겨진 이들을 위해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할까?


내가 가진 자산은 모두 아이에게 위임한다. (남편은 1원도 가져가지 못한다.)

주거래 은행은 기업은행, 신한은행, 청약 저축은 우리은행에서 예치 중이다.

키움증권에 있는 자산은 처음부터 아이 몫이었으므로 얼마가 됐든 모두 아이에게 줄 것.

내 죽음으로 인해 보험사에서 보험금이 지급된다면 그 몫도 모두 아이에게 내어 줄 것.

내가 사용하던 물건들 중에 갖고 싶은 것이 있거든 그것은 가지되, 나머지 물건들은 모두 불태워서 나와 함께 보내 줄 것.

장기간 가입했던 국민연금은 남편이 모두 가져가고, 주어진 날 동안 아끼지 말고 다 쓸 것.

아프더라도 평생 아이에게 짐이 되지는 말아줄 것.   

혹시나 내가 떠나고 아프게 되면 알아서 요양병원으로 찾아갈 것.

행여나 엄마를 잃은 슬픔으로 아이가 힘겨워하더라도 덤덤히 위로할 수 있을 것.

미련 없이 살다 간 먼지로 날려주고 남겨진 사진으로만 가끔 그리워해 줄 것.

당신과 아이의 추모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니 굳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 것.

엄마가 없어도 너는 너대로 잘 살아갈 것.

절대로 먼저 포기하는 삶을 선택하지 말아 줄 것.


그에 앞서,

너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너를 위해, 나를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오늘도, 지금 이 순간도 되뇐다. 내게 또는 네게 주어진 시간이,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언제일지 알 수 없기에.


오늘을,

지금 이 순간을,

허투루 보낼 수가 없다.


모두가 잠든 새벽 꾸역꾸역 일어나 운동을 하는 것도 어찌 보면 살고 싶은 몸부림일 것이다. 그 몸부림은 나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너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너와 함께 네 곁에 머물고 싶다.

삶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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