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는 참지 않았다_구오, 위즈덤하우스, 2019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주다 머뭇거리던 때가 있었다. 그림에 시선을 올려둔 채 엄마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아이에게 '이걸 읽어줘도 괜찮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읽던 책이니 마지막까지 읽어주고 나서, 내 안에서 올라오는 묘한 감정과 마주해 본다. 당시 읽고 있었던 책은 전래동화였다.
구전으로 내려오다 책으로 만들어진 것이 전래동화다. 대부분의 소재가 '권선징악', '남성 중심 가부장제', '나약한 여성', '예쁜 여성' 등등 책 속에 삽입된 남성은 우월하고, 여성은 미천한 존재로 묘사되어 있는 책이 태반이었다.
아이와 함께 전래 동화를 읽으며 부조리를 깨달은 독서토론 '구오' 멤버들은 고정관념과 차별, 여성 혐오 없이 전래동화를 다시 쓰기 위한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그렇게 해서 엮어진 책이 바로 이 책 <선녀는 참지 않았다>이다.
"이 프로젝트는 차별과 편견에 기반을 둔 의식 구조를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기 위한 시도입니다. 전래동화가 내포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그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성차별주의를 타파하는 것이 저희가 페미니즘 전래동화책을 발간하고자 하는 목적입니다."
구오(俱悟), '함께 깨닫다'라는 이름 아래 2015년부터 함께 읽고, 쓰고, 생각을 나누는 독서토론 모임이다. 여러 종류의 책을 접하면서 여성적 시각이 담긴 콘텐츠의 다양성이 부족하다고 절실히 느꼈고, 그 깨달음이 한국의 전래동화를 페미니즘 시각에서 다시 써보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선녀는 참지 않았다>는 페미니즘과 사회이슈에 대해 구오가 읽고 공부한 결실이다. 대중들에게 친숙하면서도 기존의 서사에서 문제적 지점이 드러나는 전래동화 10편을 선정했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 다시 썼다. 대부분의 전래동화에서 여성은 남성을 돕는 부수적 역할로만 그려지거나, 남성의 영웅적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소모적으로 사용되었다. 구오가 다시 쓴 이야기에서는 주변 인물로만 묘사되던 여성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담았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고정된 성역할과 편견에서 벗어나 있도록 원전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입체적인 이야기로 풀어냈다._책날개
구전을 각색해서 새로운 한 편의 동화가 만들었졌다. 책에서 소개한 10여 편의 동화뿐만 아니라, 다수의 동화에서 여전히 남녀차별, 남성 우월주의, 여성 혐오적인 시각이 만연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를 인식한 순간부터 전래동화와 디즈니 창작동화의 읽기는 즉각 멈추었다. 어린 시절 무의식 중에 각인된 고정관념은 성인이 된 이후 바꾸기 힘들다. 나도 양육을 하기 전까진 남성 우월주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 우렁각시_행복을 부르는 우렁 총각의 붉은 묘약
집안일보다는 바깥일을 좋아하는 혜석. 그 옛날 남성들이 도맡아 하던 밭일이며 쟁기질도 마다하지 않고 농사일을 좋아하는 여성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동네 남성들은 아녀자가 쟁기질이며 밭일을 한다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길 일쑤다. 동네 아낙네들이라고 다를 바가 없다. '시집이나 갈 것이지, 사서 고생을 한다며 그녀를 책망했다. 여자 망신 다 시킨다며 손가락질했다.' 용왕의 아들인 우렁 총각은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버지의 노여움을 견디다 못한 우렁 총각은 혜석의 집으로 오게 된다. 혜석이 바깥일을 하러 나간 틈을 타 맛있는 밥을 짓고 집안을 깔끔하게 정돈하여 혜석을 기쁘게 한다.
모두 스스로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끼은 일을 하니 일의 능률이 오르는 것은 기본이요, 서로서로 도움이 될 수밖에! 그 마을은 곧장 모든 일에 최고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되었지. '차별적인 시선' 하나 없어진 것뿐인데, 이렇게 행복하고 살기 좋은 마을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마을 사람들은 너무나도 행복했지.(p.74) 우렁각시_행복을 부르는 우렁 총각의 붉은 묘약
남녀의 위치가 바뀌었다. 여성이 집 바깥에 있고 남성이 집안에 있다. 여성의 시각에서 다시 쓰인 이 동화는 집안일을 싫어하는 여성이 염원하던 대안으로 우렁 총각이 탄생했다. 서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오손도손 행복해 보이지만 개연성이 부족하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대신해주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할 수 있을까? 용왕의 아들이라는 설정은 또 어떠한가? 그냥 바닷속 아무개 씨 집안의 남성이라는 설정은 불가능했을까?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고스란히 드러난 대목이다.
계급 사회를 지나 현시대 남녀의 위치는 어떠한가? 요즘에야 남녀 구별 없이 집안일을 하고, 맞벌이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어림없는 얘기였다. 대부분의 여성은 집안일을 하고 남성은 바깥일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것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양한 시각으로 재편성되는 사회 구조를 환영한다. 하지만, 남녀 임금격차, 남성 중심 권력 사회,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여전하며, 전에는 하지 않았던 바깥일까지 해야 하는 여성의 과업이 늘어났다.
현시대 남성이 바라는 여성상은, 돈도 잘 벌고, 애도 잘 보고, 집안 일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며, 시가 부양도 잘하는 여성을 필요로 한다. 여성이 바라는 남성상은, 돈을 잘 버는 것은 당연하고, 애도 잘 보고, 집안일도 잘하고, 시가 스트레스 주지 않는 남성을 필요로 한다. 근래 들어 남성의 육아휴직이 합법화되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어려운 현실이었다. 뿌리 깊은 고정관념으로 남녀 모두 쉽지 않은 구조속에 놓여 있다.
영주는 비록 자신이 과거를 치르고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보다 더 값진 것을 해냈어. 딸들이 고난과 차별의 굴레를 끊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이지. 세상을 밝힐 불꽃같은 존재인 장화와 홍련에게 영주는 스러지지 않고 피어날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든든한 기둥이었어. 영주에게서 피어난 불꽃은 다시는 꺼지지 않고 큰 불길을 이루어 세상을 밝게 비출 거야.(p.97) / 장화홍련을 구한 계모
재혼 가정이 늘어나서 '계모'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했던 것일까? 친절한 계모를 탄생시킨 반면 못땐 계부가 등장했다. 안타까운 역차별이다.
콩쥐는 저에게로 향한 눈이 부끄러웠던지, 아주 냅다 도망을 쳐서 그 거리를 빠져나왔지 뭐야. 벗겨진 꽃신 한 짝은 내팽개쳐둔 채 말이야. 원님은 그런 콩쥐를 보고 의아해했지. 그런데 콩쥐의 미모가 어찌나 빼어나던지 원님은 그 모습에 반해버리고 말았어. 원님은 곧장 콩쥐가 어떤 아이인지 수소문을 하였지.(p.120)
그러나 착하고 어리석은 콩쥐는 원님과 한 약조를 지키지 못했어.(p.122) / 콩쥐팥쥐전_어여쁜 꽃신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예쁘고 착한 콩쥐는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덕분에 원님의 부인이 될 수 있었다. 콩쥐가 예쁘지 않고 착하기만 했어도 원님의 부인이 될 수 있었을까? 신발이 벗겨진 콩쥐는 왜 다시 돌아가서 신발을 신지 않았을까? 여성은 항시 착하고 예뻐야 하는가? 예쁘고 순종적이어야 남성들에게 잘 팔려 가는가? 재해석한 내용에서도 뿌리 뽑지 못한 '외모지상주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보며 개탄을 금치 못했다.
디즈니 동화라고 다를 바가 없다. '성냥팔이 소녀'는 왜 성냥만 팔고 있었을까? 돈이 없어 생계가 어려우면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서 돈을 벌 생각을 해야지, 한낱 성냥밖에 팔지 못하는 나약한 여성으로 그려 놓았다. 여성과 남성의 수직적 구조를 이룬 동화들을 보며 울화통이 터지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박씨전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다 저의 덕이 부족한 탓입니다. 언젠가 제가 허물을 벗을 날이 필히 올 것입니다.(p.131)
박씨는 박색한 외모 덕에 시가에서 쫓겨나고, 친정아버지가 신호를 주는 그 날에 어여쁜 각시로 탈바꿈한다. 박색한 각시를 피화당으로 쫓아버린 남편은 각시가 예쁘게 변하자 그제야 첫 날밤을 치르며 부인으로 맞아들인다. 옛 말에 '남자는 얼굴 보는 거 아니다. 남자 얼굴이 반반하면 얼굴값.' 한다는 얘기가 있다.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남자의 박색한 얼굴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속뜻을 포함하고 있다. '북어와 여자는 사흘마다 몽둥이로 패야 제 맛이다.'라는 여성 혐오 발언이 있다. 이 말은 신조어가 아니라 예전부터 내려오던 구전이다. 여성을 얼마나 하찮게 여겼으면 몽둥이로 팬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가. 오늘날에도 스스럼없이 내뱉는 사람들을 보며 한숨이 깊어진다.
각색한 대부분의 내용은 남녀의 위치가 바뀌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여성의 입장에서 통쾌하게 읽혔지만, 찝찝함은 남아 있다. 여성 스스로도 뿌리 뽑지 못한 '외모지상주의', 구조의 상위를 여성이 선점한다는 시각에서 이번엔 '여성 우월주의' 성향이 짙은 책으로 탈바꿈되었다. 여성으로서 또 여아를 둔 엄마로서 환영하지만, 남아를 둔 엄마 입장에서는 글쎄? 엄마들 자체가 여성이기에 차별 없이 수용할 수 있을까? 발상의 전환은 좋았으나 한계를 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것에서 한 발짝 나아간 시도임에는 틀림없다. 책 말미 스스로 자성하며, 이 책의 한계를 전하고 있는 것 또한 큰 울림을 주었다. 독서토론 멤버들끼리 합심하여 한 권의 책까지 엮어 낸 그녀들이 위대해 보인다. 읽고, 생각하고, 쓰고, 토론하며 계속해서 세상의 문을 두드려주면 좋겠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