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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soh Sep 15. 2019

종양내과 의사를 통해 바라보는 관조의 삶

잃었지만 잊지 않은 것들_김선영, 라이킷, 2019

저자는 14년 차 내과 전문의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내과 전공의 및 전임의 수련을 받았다. 국립암센터를 거쳐 지금은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에서 일하고 있으며 대장암, 부인암, 희귀암 환자들을 진료하고 길어낸 고통과 죽음에 대한 사유, 일상을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그녀를 돌보고 타인(환우)의 슬픔과 고통을 마음으로 안아준다


이 책은 그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부터 비롯되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중 3 시절 의도하지 않게 마주하게 된 아버지의 담낭암. 아버지는 근 1년여를 투병하다 돌아가셨고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투병 중에 있었던 일들을 함께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병중 일기를 책으로 엮었으나 훗날 왜인지 모를 후회가 밀려와 갖고 있던 책들을 모조리 버렸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그녀는 의사가 되었고 그중에서도 종양내과 전문의가 되었다. 외과는 적성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가 종양내과 전문의가 된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의사가 되어 환자들을 치료하며 그녀는 자주 아버지를 떠올렸다.


‘누구나 슬픔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하기 힘든 세상에서 상처를 내보이는 일은 부끄럽지만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전한다. 우리의 슬픔은 모두 연결되어 있어서, 더 많이 공명하고 위로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담아내며 그녀 스스로를 치유하고 타인을 위로하고 있다.


의사 이전에 인간 김선영


“선생님, 이번 달만...... 어떻게 12월만 넘길 수는 없을까요? 이제 곧 크리스마스인데...... 아이한테 12월을 엄마랑 헤어진 달로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제발......”


그날은 어떻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환자에게 너무 미안해서, 두 살 된 아이에게 너무 미안해서, 환자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P.32)


그냥,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부모를 잃은 아이가 살아가는 방법은 부모를 잃지 않은 아이가 살아가는 방법만큼이나 여러 가지이고, 오로지 결핍만이 그 아이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슬픔이 있는 삶은 다른 슬픔에도 더 많이 공감할 수 있는 색깔을 하나 더 지니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이는 잘 살아갈 것이라고.(P36~37)


없어. 이제 정말 아빠는 없어. 울면서 되뇌며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이 역시 극심한 트라우마 후의 비현실화(derealization) 반응이라는 것도 나중에 의과대학이 가르쳐주었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리 없어!”하며 울부짖는 것은 드라마에 나오는 장면이다. 실제로는 오늘이 아빠가 없는 세상의 1일이고 우리는 그 땅에 발 딛고 서 있다는 것을 서서히 확인하며, 한편으론 도대체 인간은 얼마나 오래 울 수 있는지 궁금해하게 된다. 나는 아빠가 돌아가시면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잠시나마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아니, 이건 또 전혀 새로운 고통이야. 아픈 아빠여도 지금 그 자리에 이전처럼 누워있으면 얼마나 좋을까.(p.83)


부모를 잃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남은 자의 슬픔. 저자는 아버지를 잃어 본 경험으로 엄마 없이 남겨질 아이의 아픔을 들여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나는 부모를 잃은 경험이 없다. 다만, 출산 이후 찾아 든 잔병치레로 몇 차례 병원을 들락거리며 남겨질 아이의 모습을 가끔 그려보기는 한다. 신기한 것은 남겨질 아이의 모습은 선명하게 그려지지만 남편과 내 부모의 모습은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일까?


결혼을 기점으로 잦은 갈등이 빚어졌다. 가족이라는 미명하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던지 이루 다 말하기 힘에 겹다. 사무치는 서글픔을 온몸으로 참아내며 숱한 날들을 눈물로 보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부모에 대한 섬김을 다하였으나 부모는 자식에 대한 섬김을 다하지 않으셨다. 남존여비 사상이 뼛속 깊이 자리 잡은 부모를 가진 이들은 어느 정도 공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옛날에는 다 그러고 살았다는, 옛날 어른들은 다 그렇다는 뻔한 얘기들은 그 어떤 위로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어낼 수 없는 것을 천륜이라 하는 것 같다. 미운 부모라도 옆에 계실 때 투정할 수 있는 것이란 것을 부모가 없는 이들을 목도하며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부모가 부재'하나 내게는 존재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부러움의 대상으로 전략하게 된다. 어리석게도 타인의 아픔을 거울삼아 내 아픔을 치유할 수 있었다.


부모와 남편에 대한 섬김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자주 되뇐다. 하지만 아이에 대한 섬김은 여전히 부족하여 그녀 곁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크다. 책을 읽으며 가슴이 미어지던 순간은 두 살배기 아이와 사별해야 하는 장면을 마주할 때였다. 아이를 낳아 본 경험으로 그녀의 슬픔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일곱 살 이후로 아이는 종종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엄마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돼.'라는 말을 눈물을 글썽이며 종종 꺼낼 때는 '얘가 도대체 왜 이러나?'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이 작은 아이에게도 죽음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슬픔이 되는구나 싶어 가슴이 아린다.


아이의 슬픔을 감싸주고 싶은 것은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노동하는 ‘의사’


오늘날 박리다매식으로 운영되는 우리나라 대다수의 암 병원은 한마디로 공장형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검사 결과가 나오면 속전속결로 환자에게 통보하고 휘몰아치듯이 바로 치료를 시작하는 와중에는 이런 ‘느린 진료’가 이루어질 틈이 없다. 대부분의 병동에는 따로 상담할 만한 조용한 방도 없다. 병동을 다니다 보면 복도에서 서서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하는 의사, 풀이 죽거나 우는 보호자가 종종 눈에 띈다. 환자 치료가 중요하지, 보호자와 어디서 얘기하건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아무나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한 사람의 절체절명의 순간을, 그것도 당사자 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옳은가? 늘 해왔던 일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소스라치며 놀라게 되는 것이다.(P.27)


우리의 왜곡된 의료현실(저수가에서 비롯된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서 죽어가는 이의 존엄은 이렇듯 지켜지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종종이 고통스러운 시기가 없는 게 나을 것 같다 자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다. 우리의 의료시스템은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 죽어가는 이들의 존엄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원을 투자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90년대와는 달리, 현재는 호스피스 완화 의료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여러 의료 기관들이 생겼다. 임종 환자의 고통을 돕는 의료 서비스의 양적, 질적 수준은 호스피스의 개념 자체도 없던 90년대에 비해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아직 대부분의 환자들은 호스피스를 죽으러 가는 곳으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포기하지 않기를 원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것을 죽음을 재촉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준비하기만 한다면, 비교적 양질의 돌봄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P.78)


하얀 가운을 입고 표정 없는 얼굴로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을 볼 때마다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며 살았다. 가끔 친밀감을 표현하는 의사를 만날 때면 ‘과잉 진료’를 하기 위한 포석이 아닌지 의심을 하는 날도 있었다.


의사로 살아가는 삶이 녹록지 않은 것을 자주 발견했다. 책을 읽으며 필사한 노트를 살펴보니 그녀의 고된 삶과 마주한 순간들로 채워져있었다. 환우를 치료하는 삶이 대형병원의 시스템에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보며 과연 ‘인간의 존엄이란 것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서글픈 마음에, 불가능하겠지만 아프지 않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잠깐 해보았다.


의사의 삶을 살아보지 않았기에 의료진의 고달픔을 알기 어렵다. 현실을 알아채기란 그래서 불가능하다.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며 간접적으로 의사의 삶을 경험해 본다. 분통 터지는 의료 시스템에 화가 나면서도 자꾸만 환자의 입장에서 의사를 바라보니 그녀의 전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배부른 소리에 불과하다 치부할 것 인지 갈피를 못 잡고 고개를 갸웃거려보기도 한다. 비단 의료계 그뿐만 아니라 생계를 위해 일하는 모든 현장에서 '노동력 착취'의 순간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삶과 죽음'의 순간을 넘나드는 곳에 그녀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죽음을 자주 목도하여 내성이 생길 법도 한데 그녀는 자주 눈물을 내비쳤다. 감성과 이성이 너울처럼 움직이며 그녀 삶 순간순간을 물들였다. 아픔을 아픔으로 슬픔을 슬픔으로 함께 감내할 수 있는 환경이 그녀 주변에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심신이 약해진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의 어루만짐이 아닐까. 그녀가 원하는 환경 또한 그것이라 생각한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한 번씩 주어진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는 그래서 궁금하다. '에세이'나 '산문'을 찾아 읽는 이유 또한 그 때문이다. 자아성찰을 겸비한 신세한탄을 구구절절 써놓는 이유도 다를 바 없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며 내 삶을 반추하는 일은 그래서 필요하다. 나의 슬픔과 아픔 또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내 삶을 드러내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 언제 올지 모르는 끝까지 꽉 찬 삶을 살 수 있기를, 마지막까지 소중한 것을 놓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은 성장판 서평단으로 출판사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위의 서평은 전적으로 제 주관적인 감상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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