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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soh Oct 09. 2019

인간 소외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_김영하, 문학동네, 2019

‘알쓸신잡’에서 소비되던 그의 뇌는 섹시했다. 유시민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박학다식한 그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의 말투, 사용하는 어휘, 그가 풀어내는 스토리 라인까지.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게 연결되는 얘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꼼짝없이 티브이 앞에 붙잡혀 있곤 했다.

프로그램을 보며 여태까지 베스트셀러가 없는 것이 의아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티브이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필력에 괴리가 있는 것일까? 오만 상상을 다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앞으로 그가 책을 출간한다면 여지없이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여타 게스트들에겐 미안하지만 알쓸신잡은 그런 프로였다. 김영하를 위해 존재하는 프로그램.

미루고 미루다 이제는 만나야지 싶어 그의 책을 찾았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그의 흔적.
남의 일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는가? 아침 출근길에 엘리베이터에 머리가 낀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손에 전화기는 없고, 출근 시간엔 이미 늦어졌고, 버둥거리는 남자의 두 발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면 나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게 될까?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의 얘기는 여기서부터 출발했다. 바쁜 출근길 고장 난 엘리베이터를 뒤로 한 채 계단으로 내려가던 남자가 맞닥뜨린 사람의 발. 그 사람을 걱정하던 것도 잠시 또다시 걸음을 바삐 하며 출근을 서두르게 된다. 보이는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전화기를 빌려달라 하소연하지만 번번이 거절당한다.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끼어서 119에 전화를 해야 한다’는 메아리를 울려보지만 그 누구도 관심이 없다. 길 건너 공중전화까지 뛰어갔다 오기엔 출근 시간이 빠듯하다.

살다 보면 이상한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아침부터 어쩐지 모든 일이 뒤틀려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하루 종일 평생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일들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하나씩 하나씩 찾아온다. 내겐 오늘이 그랬다.(p.9)

가벼이 읽다가 순간 멈칫했다. 도입부부터 잔인한 이 소설은 무엇을 꼬집고 싶었던 것일까? 바쁜 현대인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순간들을 묘사하며 타인과의 단절을 그려내고 있다. 모두가 하나같이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 삭막하구나. 땀 흘리며 분투하는 것처럼 연출되어 있지만 이 삭막한 광경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엘리베이터에 사람의 발이 끼어 있으면 곧장 집으로 달려가 119에 신고부터 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머피의 법칙으로 치부하기엔 결말이 흐리멍텅하다. 그가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것은 관심이 아니다. 관심을 빙자한 무관심이다. 그를 탓하기엔 세상은 야속하리만치 잔인하다. 후루룩 읽으면 가벼운 소설이 될 수 있지만 곱씹어 생각하면 예사로 볼 얘기는 아니다.

대부분의 얘기들이 그러했다. 다양한 공간에서 다양한 얘기들을 풀어냈다. 그가 선택한 소재(살인, 불륜, 연애)들은 평범했으나 그가 엮어낸 글은 평범하지 않았다. 망상이나 공상가라고 해도 될 만큼 엮어 낸 얘기들이 하나같이 만만치가 않다. 그의 글을 이제야 접한 것이 새삼 미안해지는 대목이다.

전화선을 통해 전해온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한동안 끊겼다가 다시 나오는 수돗물처럼 단속적이었다. 감정이 최대한 억제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한, 젊었는지 늙었는지, 또한 화가 났는지 기분이 좋은지 쉽게 알 수 없는 그런 소리 말이다.(p.79~80)

수돗물처럼 단속적이라는 구절에서 읽기를 멈추었다. 사실 멈추었다기보다는 자연스레 멈추게 되었던 것 같다. 단속적인 목소리. 목소리가 단속적이다. 통화를 할 때 가끔 전달되는 끊어지는 목소리. 그것을 그는 단속적이라 표현했다. 목소리를 단속한다. 여태 보지 못했던 접근이다.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물이 나오다 말다 하는 것을 단속적이라 표현하나? 계량기가 고장 나서 의도치 않게 매끄러운 것을 매끄럽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단속적이라고 하나? 그는 어떠한 의미로 이 문장을 완성했을까? 생각하며 이 문장을 만들어 낸 그가 경이로웠다.

어제 이와 비슷하게 소름 돋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내가 처음 이 구절을 접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전달받았다. ‘압력솥’을 소재로 관심 분야 얘기를 매끄럽게 풀어내던 글. 블로그에 기록된 그 글을 보며 온몸에 잔털이 삐죽이 올라오는 경험을 했다. 소재의 선정과 매끄럽게 흘러가던 글이 경이로웠다.

“세상의 모든 흡혈귀들은 거세당했다. 세상은 빛으로 가득하다. 어디에도 숨을 곳은 없다. 우리는 흡혈의 자유와 반역의 재능을 헌납당했고 대신 생존의 굴욕만을 넘겨받았다......”

선생님은 아시겠죠? 남편과 그의 동료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서히 적응해왔던 거예요. 그러면서 그들은 흡혈귀의 본능들을 상실해갔던 거죠. 빛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그들은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했죠. 더 이상 피를 먹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던 그들은 밥이든 빵이든 구해야 했고, 그러자면 생활인이 되어야 했던 거죠. 그러지 않으면 늘 허기에 시달릴 테니까. (p.104)

리얼리티인지 픽션인지 헷갈리던 소설 ‘흡혈귀’. 소름 돋는 소설이었다. 9가지의 얘기들이 하나같이 완벽했지만 유독 눈길을 끌었던 작품이다. 이 소설을 읽자마자 작가가 얘기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녹색 창에 검색을 해보았다. 과연 실존 인물일까? 픽션이라 여기기엔 지극히 개인적인 소설이었다.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얘기를 끌고 가다 보니 몰입이 잘 되었던 것일까? 그러다, 내 이 관심은 관심인 것일까? 관심을 빙자한 무관심으로 직결될 것인가? 리얼리티라고 해서 그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낸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풋’하며 냉소를 날리곤 검색창을 닫을 것인가? 머리가 복잡하다. 묘한 저항이 일어난다.

‘흡혈귀’는 거세당해서 인간으로 살아가며 세상살이에 서서히 적응해왔다. 생존에 급급한 나머지 흡혈귀의 기능은 모조리 잃어버리고 ‘돈’을 쫓는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제목부터 풀어낸 이야기까지 잔인하리만치 현실과 근접한 얘기여서 읽는 내내 씁쓸했다. 짧은 글로 소감을 전하기에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 외에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구절을 따로 모아 보았다. 이 책은 20년 전에 출간되었다. 지금 읽어도 자극적인 이 소설이 20년 전에는 어떻게 읽혔을까? 김영하 작가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그의 첫 작품으로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와 함께 하는 소설은 응당 ‘여행의 이유’를 먼저 손에 드는 것이 마땅할 수도 있으나 좀 미뤄두었다. 지금의 그도 좋지만 옛날의 그로부터 탐닉하고 싶은 욕심이려니.

잔인한가. 그렇지 않다. 개인적인 삶이란 없다. 우리의 은밀한 욕망들은 늘 공적인 영역으로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 호리병에 갇힌 요괴처럼, 마개만 따주면 모든 것을 해줄 것처럼 속삭여대지만 일단 세상 밖으로 나오면 거대한 괴물이 되어 우리를 덮치는 것이다. 그들이 묻는다. 이봐. 누가 나를 이 호리병에 넣었지? 그건 바로 인간이야. 나를 꺼내 준 너도 인간. 그러니까 나는 너를 잡아먹어야 되겠어.(p.68)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다. 냉혹한 킬러들에게는 단 한 번의 실수가 예정되어 있다. 그 실수란 나약함 때문에 빚어지므로 그런 인간 된 자의 숙명이다. 그 단 한 번의 실수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게 하드보일드의 문법이다. 킬러는 못 되는, 그저 세상에서 조금 비켜섰을 뿐인 나 같은 인간에게도 지켜야 할 룰이 있다. 나는 그 룰을 어긴 셈이었다.(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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