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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soh Jan 13. 2020

사랑의 결정 작용

오만과 편견_제인 오스틴, 김유미 옮김, 더 클래식, 2019

<오만과 편견>의 시대적 배경이 되고 있는 18세기 말의 영국은 전통성과 근대성이 공존하던 과도기적 시기였다. 당시 영국은 왕권 국가 체제로 신분에 의한 계층 구분이 엄격했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일어난 산업화로 막강한 경제력을 갖춘 상인, 변호사, 군인과 같은 신흥 계급이 급부상하게 되면서, 영국 사회의 중심이었던 귀족 계급은 신흥 계급과 공존하게 된다. 이런 분위기는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신흥 계급이 실질적인 주도권을 갖게 되면서 계층간의 격차가 완화되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문화도 형성되었다. 신흥 계급의 취향에 맞춘 춤, 음악, 극장 등이 발달하였고, 산문과 소설도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는 대중계몽에 큰 역할을 하였고, 약소 계층이었던 여성의 지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영국은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가치관이 지배적이었다. 여성들은 사회, 정치, 경제적 활동은 물론이고, 교육과 결혼에 있어서도 제약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은 독립적인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없었다.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결혼이었고, 현모양처에 대한 지나친 강요나 정략결혼과 같은 폐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3, p.263~p.264)


그분이 거만하게 행동하는 건 다른 사람들이 잘난 척하는 것과는 달라요. 전 그다지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어요.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이니까요. 집안이며 재산이며 모든걸 다 갖춘 남자가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자부심을 가질 만하죠.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오만할 권리가 있어요.(p.40)

내 생각에 오만은......
인간에게 매우 흔한 약점이야. 내가 지금까지 읽은 책에 따르면 오만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성향이야. 인간은 본성적으로 오만에 빠지기 쉽게 되어 있어. 그리고 실제건 상상이건 자신의 특성에 대해 나름대로 자만심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해. 허영과 오만은 흔히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거야. 허영이 없는 사람도 오만할 수 있어. 오만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고, 허영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봐 주기를 원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비롯된 거야.(p.40~p.41)

겸손을 가장하는 것보다 더 사람을 기만하는 건 없죠. 그건 자기 견해가 없거나, 은근히 자만심을 드러내는 것일 때가 많아요.(p.91)

사실 제겐 배려심이 부족합니다.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기엔 너무 고집이 세죠. 저는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은 행동이나 부족한 점을 빨리 잊지 못합니다. 저에게 무례한 사람들의 행동 역시 마찬가지죠. 그런 감정을 없애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더군요. 저는 남을 잘 용서하지 못하는 성격인 것 같습니다. 한번 잘못 본 사람은 끝까지 좋아할 수가 없으니까요.(p.108)


제 청혼이 당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면 이런 잘못을 묵인하고 넘어가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청혼을 오랫동안 망설였던 이유를 솔직하게 고백해서 당신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만일 제가 좀 더 머리를 써서 제 마음속의 갈등을 숨기고, 이성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어떤 면으로든 전혀 흠잡을 데 없는 완전한 사랑 때문에 당신에게 청혼하는 거라고 말씀드려서 당신의 자존심을 만족시켜 드렸다면 이렇게 혹독한 비난은 면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전 어떤 종류의 가식이든, 가식적인 건 혐오합니다. 제가 말씀드렸던 감정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감정을 갖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니까요. 제가 당신 집안이 열등하다는 사실을 기뻐할 거라고 기대하시나요? 저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분이 낮은 집안과 맺어지는 걸 자축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p.114)

내 판단력을 너무 과신했어. 내 지성을 너무 과대평가했어. 관대하고 솔직한 언니의 성품을 은근히 비웃고, 근거 없이 남을 의심하는 걸로 내 허영심을 만족시켰던 거야. 이제야 깨달았어. 정말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내가 사랑에 빠졌다고 해도 더 이상 우매할 수는 없었을 거야. 하지만 내 어리석음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허영심 때문이었어. 두 남자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난 너무 분별력이 없었어. 한 사람이 내게 호감을 표시하는 데 기분이 우쭐했고, 다른 한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 게 불쾌해서 참을 수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두 사람의 일에 관해서 편견과 무지에 사로잡혀 있었어. 이 순간까지도 나는 자신을 너무 몰랐어.(p.141~p.142)

​엘리자베스의 결혼관이 자신의 가족을 토대로 형성된 것이었다면, 그녀는 결혼의 행복과 안락한 가정에 대한 기대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젊음과 미모와 착해 보이는 성품에 반해 한 여인과 결혼했다. 그러나 남자들의 눈에 젊고 아름다운 여성은 당연히 온순하고 착하게 보이게 마련이어서, 막상 결혼하고 보니 머리도 좋지 않은 데다 마음도 좁고 편협한 여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에 대한 모든 애정을 잃고 말았다. 아내에 대한 존경과 존중, 신뢰는 영원히 사라졌고 행복한 가정에 대한 기대도 완전히 깨져 버렸다. 그러나 베넷 씨는 자신의 우매함과 잘못으로 인한 보상을 건전하지 못한 쾌락에서 얻으려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결솔한 선택이 빚어낸 결과를 무책임한 행도응로 해결하지 않았다. 그는 전원과 책을 사랑하는 취미 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그의 아내는 무식하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그에게 재밋거리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생복을 줄 수 없는 여자였다. 평범한 남자라면 자기 아내를 비웃는 데서 즐거움을 찾으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철학자라면 주어진 여건 안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는게 마땅한 일이었다.(p.189~p.190)

엘리자베스는 이전에도 종종 느꼈지만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던 일이 정작 이루어지고 나면 기대했던 것만큼 만족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진정한 기쁨을 누리려면 자신의 소망과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는 또 다른 시간을 정하고 기다림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으로 현재의 자신을 위로하고 다시 실망할 순간에 대비해야 했다.(p.191)


두 사람은 틀림없이 잘 살 거다. 두 사람의 성품이 다른 게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둘 다 귀가 얇아서 아무것도 결정되는 게 없을 거고, 너무 마음이 약해서 하인들은 죄다 두 사람을 속여 먹으려 들 테지. 게다가 너무 인심이 후해서 늘 수입을 초과해서 살 거다.(p.182)

제 인생철학 중에 이런 게 있어요.

‘기쁨을 주는 기억만 추억하라.’

그런 철학이라면 신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과거를 기억하면서 느끼는 만족감은 철학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비난받을 만한 일이 전혀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철학보다는 그런 순수함이 훨씬 귀중한 것이죠. 그렇지만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과거를 돌아볼 때마다 쫓아 버릴 수도 없고, 쫓아 버려서도 안 될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저를 공격합니다. 저는 평생 이론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실제적으로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올바른 원칙들을 배웠지만 그 원칙들을 실행할 때 오만하고 자만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저는 외아들이었습니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꽤 오랫동안 하나뿐인 자식이었죠. 제 부모님들은 좋은 분들이셨지만. 제 부친께서는 특히 너그럽고 따뜻한 분이셨죠. 그분들은 저를 응석받이로 키우셔서 저의 이기적이고 오만한 행동을 나무라시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고 가르치신 셈입니다. 저는 우리 집안 사람들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고, 나머지는 모두 미천한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제 자신에 비추어 그 사람드르이 생각과 가치가 형편없다고 생각했죠. 저는 여덟 살 때부터 스물 두 살이 된 지금까지 늘 그랬어요. 지금도 사랑스러운 엘리자베스 양이 아닌 다름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그럴지도 모릅니다. 제가 당신에게 얼마나 큰 빚을 졌는지 모릅니다. 당신이야말로 제게 훌륭한 가르침을 주신 분입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제겐 너무도 유익한 가르침이었습니다. 당신 때무에 저는 겸손함을 배울 수 있었죠. 저는 처음 당신에게 청혼했을 때 승낙 받을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여자를 기쁘게 해 줄 모든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제 자만심이 얼마나 한심한 것이었는지 당신이 깨닫게 해 주셨죠.

‘그때 제가 청혼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물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 허영심이 어이없다고 생각하시겠죠. 저는 당신이 제 청혼을 바라고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저의 태도에는 분명 잘못된 점이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의도적으로 당신을 기만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따르다 보면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그날 저녁 이후로 저를 증오하셨겠죠?’

‘증오하다니요! 물론 처음에는 화가 났었죠. 하지만 저의 분노는 곧 올바른 방향을 찾아가더군요.’

(P.222~p.224)

엘리자베스는 예전에 자신이 좀 더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신중하게 말을 가려서 하지 않았던 게 후회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랬더라면 지금처럼 어색한 변명과 해명을 늘어놓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녀는 어색하고 당황스러운 태도로 다아시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아버지에게 고백했다.(p.237)

오만한 ‘다아시’와 다아시에게 ‘편견’을 가졌던 엘리자베스가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 결혼까지 이르게 되는 내용으로 담겨있다. 오만했던 다아시는 엘리자베스를 사랑하게되며 오만했던 지난 날을 반성하고 겸손을 배우게 된다. 다아시에게 극도의 편견으로 똘똘 뭉쳐 있던 엘리자베스는 그를 이해하게 되며 편견을 내려놓고 사랑에 빠져들게 된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상대를 얻기 위해 자신의 본성을 내려 놓고 배려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으니.

엘리자베스가 살던 시대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나 경제 활동이 불가능한 시대였다. 여성이 태어난 가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결혼’밖에 없었다.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예쁘게 치장을 하고 무도회를 들락거리며 결혼 상대를 물색하는 것이 전부였다.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롯은 오직 ‘결혼’을 위해 애정도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한다. 샬롯은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영위하고 인생 최대의 목표를 실현한 것에 안도하며 만족감을 드러낸다.

결혼을 결정 짓는 요소는 여성의 외모였다. 외모가 우월한 여성이 엘리트 집안의 선택을 받는다. 엘리자베스의 언니 제인은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한다. 제인은 네더필드에 머물게 된 엘리트 집안의 ‘빙리씨’ 결혼 상대로 손색이 없다. 빙리는 제인의 아름다운 외모에 홀린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 중에 주체적인 여성은 엘리자베스가 유일하다. 그녀의 외모는 언니보다 조금 못한 정도이다. 엘리자베스는 사랑이 없는 결혼은 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녀의 사촌 콜린스가 청혼하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엄마는 리지(엘리자베스의 애칭)를 나무라지만 아빠는 리지의 결정을 지지해준다. 만약 아빠도 엄마와 동일한 잣대로 딸자식들을 대했다면 리지는 콜린스의 아내가 되었을 것이고, 그녀는 내내 불행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그녀는 다아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의 사랑은 한번에 눈 먼 사랑이 아닌 가랑비처럼 조금씩 스며들었다. 어느 순간 다아시를 향한 그녀의 감정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부풀게 되었고, 그녀가 용기를 낸 덕분에 다아시와 인연이 맺어졌다.

소설은 리지와 다아시가 결혼 허락을 받아 낸 장면에서 끝이난다. <1권>과 <2권>을 읽었는데 <3권>까지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3권>을 주문해놓고 기다리는 동안 영화를 보며 책을 기다렸다. 소설의 감성을 영화에서 다 녹여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책을 모두 읽고 내려놓는 순간 묘한 떨림이 찾아들었다. 이성과 감성이 충분히 채워졌다는 만족감에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작품이었다.


제인 오스틴
1775년 12월 영국 햄프셔 주 스티븐턴에서 교구 목사인 아버지 조시 오스틴과 어머니 커샌드라 사이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으며, 열두 살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795년에는 <엘리너와 메리앤>이라는 첫 장편소설을 완성했다. 1796년에는 사랑의 아픔을 바탕으로 <첫인상>을 집필했는데, 아버지의 권유로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하지만 오스틴은 이후에도 습작과 초기 작품의 개작을 계속했다.
1811년 <엘리너와 메리앤>을 <이성과 감성>으로 개작하여 익명으로 출간했고, 1813년 <첫인상>을 <오만과 편견>으로 개작하여 출간했다. 이후에 <맨스필드 파크><엠마>를 출간하여 왕성한 활동을 이어 갔으나, 1815년 <슬득<을 탈고한 후 건강이 악화되어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다.
1817년 <샌디션>을 집필하던 도중 건강이 악화되어 작품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그해 7월 마흔두 살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사후에 <노생거 수도원><설득>을 비롯해 개작된 작품과 생전의 습작품, 편지 등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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