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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soh Jan 06. 2020

아무튼, 술

김혼비, 제철소, 2019

아무튼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가지를 담은 에세이 시리즈이다. 수많은 ‘아무튼시리즈 중에서 유독 돋보이는 에세이 <아무튼, > 김혼비 작가의 삼원색은 , , 축구인데, 축구에 이어 술로도 책을 쓰니 세상의 모든 색깔을  가진 기분이라고 한다. 얼마나 행복할꼬.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썼다.


이상한 일이었다. 웃음이  멋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목이  메었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려는데 어찌해볼  없는 속도로 눈물이 밀려오더니 순식간에 툭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힘’ 다음에 이어서 하려던 말들이 입안에서 맴돌다 그냥 삼켜졌다. “힘내세요라니. 이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힘내세요 발음하려는데 자꾸 눈물이 나왔다. 그는 대체  힘내라고 했을까. 별생각 없이  말일 수도 있다. 아니,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어디 여자가 그렇게 술을 먹고 다니냐고 꼰대 중년 남자 같은 훈계를  수도 있었다. 투덜댈 수도 있었고, 됐다고 퉁명스럽게 넘길 수도 있었고, 괜찮다고 심상하게 답할 수도 있었고, 그냥 ‘라고만  수도 있었다.  높은 확률로 아무 답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힘을 내라고 했다. 하필.(p.59)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을  가끔 낯선 이들이 ‘던지는  한마디에 울음이 터져버리는 때가 있다. 어느 순간 ‘들어온  한마디로 참던 눈물이 터져버리고, 울다 울다 도대체 눈물이 언제까지 나는지 궁금해서 눈물과 내기라도 하는  마냥 펑펑 쏟아낸다. 힘든 것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괜찮은 척해보지만 겉으로 이미  드러내고 있음에도 아닌 , 모르는  발뺌을 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 떨어진  한마디에 위로를 받게 될 줄이야. 

그녀와 쿵작이  맞는 T. 술친구로 더없이 궁합이  맞는 T 그녀는 결혼을 했다. 함께 살면서 같은 관심사가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녀가 그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 , 순전히 술이 부족했던 것은 운명이라는 끄나풀이 아니었을까. 그녀의 기억 속에 섬세히 자리 잡고 있는 그의 . 술과 함께  역사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 마셨던 술은 ‘앱솔루트.’


사실 여자들의 혼술에는 예전부터 감수해야  몫들이  있어왔다. 냉채족발집에서 겪은  같은 묘한 시선들은 많게든 적게든 종종 따라붙었다. 주문을 받는 가게 주인의 탐탁지 않은 표정을 대면할 때도 있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이야~ 세상  좋아졌다. 여자가 초저녁부터 밖에서 혼자 술도 마실  있고같은, 세상이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는 증거이자 이유  자체인 사람들의 비아냥 섞인 시비를 겪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때로는  뒤에 시비의 강도가 거세져도 말릴 생각 않고 거기에 슬쩍 묻어 힐난의 눈빛을 던지는 가게 주인이나 주변 손님들의 이야기가 덧붙기도 했다.(p.132)

세상  좋아졌다. 여자가 초저녁부터 밖에서 혼자 술도 마실  있고라는 비아냥은 재수 없지만 시사하는  또한 분명히 있다. 그렇다. 여자들이 조금의, 아주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법적으로 허용된 공간이라면  어디에서든지 밖 혼술을 마실  있는 세상이 당연히 좋은 세상이다. 밖 혼술의 기준에서 세상은 그리 좋아진  같지 않다. 오히려 나빠졌다.(p.155)

이쯤 되면 정말 애주가답다고 표현해야   같다. 평양냉면이 맛있어서 반주로 소주 일병은 우습게 마시는 그녀가 비범해 보인다. 비범해 보이는 이유는 , 하나. 내가 못하는 것을 그녀가 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혼밥은 잘하지만 혼술은 해본 적이 없거니와 용기도 없다. 어디 조용한  테이블에 앉아 세상 시름  짊어진 사람처럼 앉아서 술을 마셔볼까 생각했던 젊은 시절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생각뿐이었지 실행으로 옮겨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여성에 대한 경계가 옅어지며 예전과 같은 시선은 무시할  있지만, 거꾸로 거슬러 5년만 올라가도 ‘세상  말세다 말세.’라는 비아냥은 따놓은 당상일 것이다.  

무절제한 술자리가 아닌 이상 나도 술자리는 좋아한다. 약간의 취기와 함께 엔도르핀이 상승하며 평소에 비해 기분이 살짝 업되는 순간들을 즐기기 때문이다. 가끔 전에 없던 용기가 솟아나서  경계를 무너뜨려 보기도 하고, 나를 잠시 내려놓고 싶은 순간에는 일부러 취한 척을 해가며 술주정을 부려보기도 했다. 살짝 미치고 싶은 순간  주변에 쳐져 있던 장막을 슬쩍 걷어내고 싶은 그때 말이다. 물론, 술자리라는 것이 매번 긍정할 수만은 없기 때문에 가끔 싫은 자리도 있기 마련이지만 대걔의 술자리는 '하하호호'하며 흥을 돋우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반면에 기분이 끔찍하게 울적할  마시는 술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술을 마신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이미 경험해봤으므로. 되려 기분이  나빠지면 나빠졌지 해피엔딩으로 끝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무튼 술자리에서 벌어진 일로 왈가왈부하는 사람이 적은걸 보면 '주사'라는 핑계는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만약 술이 없다면 무슨 핑계를 대면서 미친 척 연기를   있을까?

여럿이 함께할 때는 밥이 맛있어서, 안주가 좋아서란 핑계를 대며 맥주 일병쯤은 마실  있는 나이가 되었다. 반주를   있는 나이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 정도에서는 그런 일도 가능할 법인 양 아무렇지도 않게 주문을 하고 있을 때도 있다. 어쩌랴. 안주가 ~ 좋아서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을. 특히나 나의 소울푸드 ‘김치찌개.’  입에  맞는 국물과 김치를 먹고 있노라면 가끔  생각이 난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테라 한 병만 주세요.’

백지 위에서 쓱쓱쓱쓱 같이 뒹굴며 같이 뭉툭해지며 같이 허술해져 가며 마음이 열리고 말이 열리는  일부러   있는 ‘행동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상태이다. 비슷한 기질을 갖고 있고 비슷한 상태가   있는 나의 오랜 술친구들과 미래의 술친구들과 오래오래  마시면서 살고 있다. 너무 사소해서, 너무 유치해서, 너무 쿨하지 못해서, 너무 쑥스러워서, 혹시 기분 상할까 , 관계가 틀어질까 , 어색해질까  같은 계산  던져버리고 상대를 믿고 나를 믿고 술과 함께   . 그러다 보면 말이 따로 필요 없는 순간도 생긴다. 그저 술잔   부딪히는 것으로, 말없이 술을 따라주는 것으로 전해지는 마음도 있으니까. (P.169)

그야말로 술술 읽히는 책이다. 술잘러의 술술 써 내려가는 인생. 읽는 내내 경쾌, 상쾌, 유쾌해서 키득키득거리며 단숨에 읽어버렸다.

아무튼 술은,  .

술은 마시고 싶은데 혼자 마시고 싶을 , 얘기는 하고 싶은데 마땅한 대화 상대가 없을 , 그럴   손에 술잔을 잡고, 다른 손에 책을 잡고 읽으면  좋을 책이다. 술과 함께 책이라니  얼마나 근사한가. 주종이 무엇이든,

콜콜콜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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