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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ARANTH Dec 15. 2018

런던에서 정해진 시간을 산다는 것

메일을 확인 해 보니 사무실에 부탁했던 복직 신청서가 도착해있다. 

학교에 가기 전 시간이 남아 몇 줄 안 되는 신청서를 작성하고 발송을 눌렀다. 허무했다. 


그랬다. 

나는 런던에 온 그날부터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살고 있었다. 

매일같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적던 일기에도 그 생각은 빼곡히 적혀있다. 


그 생각은 나를 더욱 오늘에 충실하게 살게 만들면서도, 

그 압박감 속에서 이곳에서의 모든 하루는 절대 불행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살게 만들었다. 


런던에서 살게 된 지 한 달을 맞이했을 때도 일기장엔 앞으로 머물 날이 더 많음에도 마음은 초조했다고 적혀있었다. 머릿속으로 이곳을 떠나는 날을, 내가 공항에 서있게 될 날을 몇 번을 그려보았는지도.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면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잘 먹고 잘 놀다가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

'오늘 하루가 그리워지면 어쩌지?'


씁쓸한 마음을 안고 학교로 향했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바람은 우산을 쓰고 걷기에도 힘들 정도로 세차게 불어댔다. 평소에 거의 탈 일이 없는 버스를 탔다. 


오전 8시 출근길 아침 버스 안. 

다양한 사람들, 나와 다른 언어. 익숙해진 지 오래인 장면들이지만 이 모든 것들이 금방 그리워지겠지. 


늘 그랬듯이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2016년 5월. 내가 런던에 처음 여행을 왔을 때도 똑같이 사진을 찍었다. 버스 안 사람들의 뒷모습. 

이 순간도 다 추억이 될 거라고, 그리울 거라고 그렇게 기록을 남겼던 기억이 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느끼는 감정은 다를 것이 없다. 



먹고살려고 런던에 온 것이 아니기에, 아등바등 벌어서 모은 돈 다 싸들고 정승같이 쓰러 온 이곳은 정말 천국이다. 생각해보면 힘들긴 했지만 이전에도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


하지만 지금의 삶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일 것이라 생각한다. 


오롯이 나를 위한 삶. 통장에 찍힌 숫자는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고 있지만, 나를 둘러싼 환경은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이 잠깐의 외국살이의 끝을 생각하면 서글프고,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이 정말 내가 누려도 되는 것인지, 한순간에 무녀 져버리는 것인 아닐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영원하지 않기에 그 모든 시간들이 소중했다.



오늘은 금요일. 어학원에서 또 몇 명의 친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유럽 친구들은 대부분이 짧게 어학원에 머물다 간다. 길면 한 달. 짧으면 일주일. 보통은 삼주 정도. 

3개월 이상 머무르는 친구들은 거의 아시아 권역 친구들이다. 


나 역시 15주짜리 장기체류자에 속했기에 매주 금요일이면 친구들을 떠나보내고, 

월요일이면 새로운 친구들을 맞이하기를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헤어짐'이라는 것은 어학원에서 꽤나 일상적인 것이었다.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스물한 살의 E. 그녀와의 추억을 꼽으라면, 뭘 먹고 체한 건지 수업 시간 내내 얼굴이 새하얗게 떠서는 엄마 보고 싶다고 울던 그녀 등을 두드려주고 바늘로 따주면서 한국식 민간요법을 시전 한 날일 것이다. 그 뒤로 나에게 많이 의지했고, 그녀의 엄마에게 나를 영상통화로 소개해주면서 "네가 우리 딸을 돌봐준 J 구나! 고마워"라는 칭찬을 들었던 것. 그녀와 작별 인사를 하며, 우린 그날을 한 번 더 회상했고, 스페인 오면 연락하라는 이야기로 마무리 지었다.


독일에서 온 열여덟 살의 B. 일주일밖에 함께 하지 않았지만 처음 우리 반에 온 날부터 내 옆에 껌딱지처럼 앉아서 일주일 내내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함께 한 그녀. 금발의 곱슬 단발머리, 주근깨가 가득한 하얀 얼굴에 커다란 미소가 번질 때면 너무 귀엽고 예뻐서 저절로 엄마 미소 짓게 하던 그녀. 여행에 관심이 많고, 특히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나에게 한국과 중국의 문화에 대해서 쉴 새 없이 질문하던 그녀는 나중에 완전히 어른이 되면 한국에 꼭 여행 가겠노라 약속을 하고 독일로 돌아갔다. 



어학원에선 모두가 런던에서 정해진 시간을 살았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놀았고, 

헤어질 땐 늘 기약 없는, 어쩌면 지킬 수 없는 약속들을 늘어놓았다.


"우리 다시 만날 거야! 내가 사는 곳에 여행 오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도 돼! 내가 가이드도 해줄 게!"


어릴 땐 그런 약속들이 희망적이었고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른이 되어서 이런 이별을 맞이해보니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우리 꼭 다시 만나"는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말처럼 쉽게 내뱉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고, 한국에 있는 친구들도 보는 게 힘든데,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사람을 다시 만난다는 건 아마 불가능할 것이라는 걸 알기에 처음부터 정을 안주는 편이 낫다는 차가운 생각을 해본 것도 사실이다. 헤어짐을 먼저 생각했기에 처음부터 기대가 없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친구들과의 만남에 충실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지만, 예전과는 달리 마음이 딱딱해져 버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일본인 친구 S와 코벤트가든 나들이를 갔던 날. 

이미 수십 번을 갔던 코벤트가든이지만 나의 눈엔 오늘도 새로운 곳이다. 


쉴 새 없이 사진을 찍는 나에게 S가 이야기한다.


"너 이제 한국에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기억하려고 그렇게 사진 찍는구나?"


"응 맞아..."


사실 런던에 오고 나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사진을 찍고 있다고 이야기하려다가 말았다. 그러고 나니 문득 드는 생각이 나는 무엇인가를 잃는다는 것에 극도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람이든, 추억이든, 장소이든, 물건이든. 그래서 사진도, 일기 쓰기도.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가 잃어버린다는 게, 잊힌다는 게 무서워서였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집으로 돌아와 홀로 저녁밥을 먹던 날. 갑자기 서러움이 몰려온다.

서럽다기보다는 그냥 마음이 아프다가 맞겠다.

플랏 메이트 동생에 문자를 보냈다.


"밥 먹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이 뿌옇네. 시간이 정해진 삶이란 게 이런 건가?"


"언니. 원래 인간은 정해진 시간 속에 사는 거예요. 인생 자체가. 영원한 삶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너무 런던과 한국을 나눠서 생각하지 마요. 인생이 한정된 시간이라고 해서 무너질 언니가 아니잖아요. 

돌아갈 수 있기에 런던에서 행복했던 이야기들을 한국 친구들한테, 가족들한테 전할 수 있는 거고, 돌아갈 수 있기에 런던에서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다시 한번 알게 되는 걸지도 몰라요. 

지금 이 시간이 언니 인생에 있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시간인 건 분명하니까 울고 싶으면 울고, 

한번 우울해보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딴생각도 해보고 해요. 즐겨요 슬픈 시간을."



헤어짐이 없는 만남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해보지만, 

헤어짐이 없다면 과연 그것을 만남이라 할 수 있을까? 헤어짐이 없다면 나의 삶이 간절하기도 했다가, 

최선을 다했다가, 그렇게 살던 시간들이 추억이라는 단어로 기억될 수 있을까?


푸른 잔디 위로 낙엽이 지는 풍경을 맞이하는 요즘. 이곳에서 또 다른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

일 년 전 여행자의 신분으로 런던에 왔을 때 내가 걷던 길, 내가 보았던 것, 먹었던 것들에는 추억이라는 진부한 단어 위로 일상이라는 색깔이 덧칠되었다. 언젠가 이 시간도 또 다른 추억이 되어버리겠지만, 

정해진 시간 속 찰나의 꿈만 같지만, 원래 인간의 삶이 정해진 시간이라는 동생의 말에 다시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런던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한번 런던을 찾았다가, 

이곳을 잊지 못해서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정해진 시간이었기에,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치열하게 최선을 다해서 살았던 나 자신이 오롯이 이곳에 남아있으니까. 


한 번뿐인 삶의 시간 속 가장 뜨거웠던 날들이 이곳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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