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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ARANTH Dec 22. 2018

내가 런던에서 얻은 것들

런던에 올 때 내가 챙겨 온 신발은 운동화 두켤례가 고작이었다.

그중 내가 가장 즐겨 신는 운동화는 연분홍색 운동화. 내가 여행을 갈 때마다 신던 운동화.

2016년 런던 여행을 준비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고르고 골라서 샀던 운동화. 운동화는 나를 런던으로 데려다주었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게 할 꿈을 꾸게 해 주었고, 꼭 다시 런던으로 오게 해 주겠노라 약속해주었다. 


그다음 해에 나는 이 분홍 운동화와 함께 6개월짜리 런던 살이를 위해 비행기에 올랐고,

약속대로 운동화는 나를 다시 런던으로 데려다주었다.


이곳에서도 운동화는 늘 나와 함께 했다. 학교에 갈 때도, 런던 구석구석을 누빌 때도, 마트를 갈 때도, 

운동화는 런던 생활 모든 순간을 나와 함께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동화 양쪽 밑창이 완전히 떨어져 입을 벌린 채 운동화는 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런던 생활 100일을 맞이할 때쯤 내가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았을 때쯤, 운동화는 자신의 몫을 다 한 것 마냥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그렇게 나의 곁을 떠나 쓰레기 통으로 직행했다.



100일이라는 시간을 돌이켜 보면 재미있는 것은 한식도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생각나지도 그립지도 않았다. 원래 빵을 좋아하거니와 여행을 다닐 때도 현지 음식을 즐겨 먹고 한국 음식은 챙겨 다니지 않았다. 물론 런던에 올 때도 한국 음식은 하나도 챙겨 오지 않았다. 그 좋아하던 매콤한 음식마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장바구니 물가가 외식 물가보다 확실히 저렴했고, 한국에서는 비싸서 즐겨 먹지 못하는 식재료도 매일같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마트에 갈 때마다 나의 고민은 이 많은 식재료를 한 번씩 다 요리해 볼 수 있느냐 였다. 냉장고를 열어봐도 플랏 메이트와 집주인 언니의 식재료와 나의 식재료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나만큼 부지런히 먹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비몽사몽으로 끼니를 거르고 출근할 때 나는 항상 일찍 일어나서 분주하게 주방에서 요리를 했고 늘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갔다. 그래서 나는 8년 차 런더너 집주인 언니도 인정한 런던이 체질인 사람이었고, 귀국을 할 때까지 나는 그 맛없다는 영국 음식을 가장 맛있게 즐겼다. 사실 지금도 영국 음식 맛없다는 글을 보면 괜히 씁쓸해진다.



한국에서 막연하게 어학연수를 꿈꾸기 시작할 때쯤.

거의 2년 동안 출근 전 1시간,  퇴근 후 꼬박꼬박 2시간씩 영어 공부를 했고, 주말에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어학연수생 필독서라 하는 Grammar in use가 닳도록 20번은 족히 넘게 보았고, 아침마다 BBC 뉴스를 듣고, 몇 마디 해볼 거라며 전화영어며, 회사에서 전혀 쓸 일이 없는 영어인데, 사서 고생을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부를 했다. 다행히 그 시간들은 헛되지 않았고, 어학원에서 13주 만에 두 개의 레벨을 업그레이드하고 마침내 Advanced level에 입성했다. 


처음 런던에 올 땐 막연하게 최고 레벨로 졸업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내 사랑 선생님이 나는 반을 옮겨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학생 매니저가 나의 에세이 과제를 보고 충분히 레벨 변경 자격이 된다는 말을 했을 때,  목표했던 레벨이 찍힌 새로운 시간표를 받아들였을 때 그렇게나 가슴이 설레고 인정받았다는 것에 신이 났는지 모른다. 어학원 졸업 후 대학교로 옮겨서도 나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인터뷰 시험을 통과해서 레벨을 유지할 수 있었고, 런던 생활 막바지에 객관적으로 나의 실력을 검증해보고자 신청했던 캠브리지 시험에서도 예상 밖의 성적을 거두었다. 



매일매일 어학원 가는 날이 기다려졌고, 수업도 공부도 너무 즐거웠다. 런던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보고 듣고 친구들과 어쭙잖게 주고받던 몇 마디 영어들도 다 살아있는 공부였다. 이래서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하나 보다.  하고 싶은 일은 찾아서 스스로 하게 되고, 더 깊이 파고들게 되고 무엇보다 내가 즐기면서 할 수 있다. 이래서 일이든 공부든 즐기면서 하는 자를 이기지 못하는가 보다 싶다. 


어학원에서 내가 만나는 친구들이 한창 20대의 열정 넘치는 동생들이 대부분인지라 우리의 대화 주제는 어떻게 영어 실력을 늘릴 것이냐 또는 장래 진로와 직업에 대한 비전을 고민하는 것 등이었다. 동생들과 이야기를 할 때면 대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당장 영어가 취업을 위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멀쩡한 직장도 가지고 있는데 동생들과 이야기를 할 때면 덩달아 심각하게 고민했다.


나의 미래와 직장에 대해서 걱정하고, 하루 종일 열심히 놀기만 한 날이면 공부를 안 한 것에 죄책감에 들기도 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어찌 보면 그들이 내 곁에 있기에 다양한 가치관을 공유하고, 새로운 트렌드를 아이디어를 배우기도 하고, 그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다가 결국 내가 가진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아가기도 했는지도 모르겠다. 



가을에 접어들 때 시작한 런던 예술대학에서의 쇼트코스는 꿈에 그리던,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의 외국에서의 대학 캠퍼스 생활이었다. 나의 전공과 직업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분야지만 직장 생활 시작하고서야 관심이 생긴 분야에 대한 공부. 여태껏 접해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세계. 그리고 하나씩 차근차근 팀원들과 방향을 잡아가며 완성한 프로젝트까지. 모든 것이 새로웠고 신선한 배움이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수업을 하고도 집에 가는 게 싫어서 도서관에 남아서 세상 처음 보는 매거진이며, 지나간 자료들을 넘겨보고, 외국인 친구들은 어떻게 공부하는지 관찰해보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우며 빨리 내일 수업이 오길 기대했고, 석사 도전에 대한 꿈을 가져보기도 했다. 


이곳에서 나를 처음 만난 사람들은 내가 이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며 놀라곤 했다. 내 취미와 나의 성격과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과 관계된 쪽의 직업일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인 나의 본모습을 알아주는 사람들, 있는 그대로의 나로 봐주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엔 나를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은데 말이다. 



또한 내가 매일 같은 옷을 입던, 색이 요란한 옷을 입던, 노출이 많은 옷을 입던, 머리를 감지 않던, 다 떨어진 신발을 신던, 내가 무엇을 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한국에선 약속을 취소하려면 온갖 변명을 만들어내야 했고, 취소하고 나서도 찝찝한 기분에 시달려야 했지만, 이곳에선 내키지 않는 초대엔 있는 그대로 "나는 가지 않을래. 물어봐주서 고마워."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상대가 상처를 받는 일도 없었고, 다음 이벤트에 나를 배제하는 일도 없었다. 


모든 것을 혼자서 척척 해내야 하는 이곳에서 정이라던지, 지인 찬스라던지, 얼렁뚱땅 애교와 칭얼거림으로 해결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내 입장을 제때 말하지 않고 남이 알아주길 바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안 되는 것은 말 그대로 안 되는 것이었고, 부당한 것은 부당한지, 내가 필요한 것이 왜 필요한지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권리를 찾을 있었다. 목소리 크다고 되는 건 없었다. 처음엔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데, 입장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 여간 벅차고 살기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한국에서 얼마나 쉽게 일을 처리하고 얼렁뚱땅 넘어간 일이 많았는지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가진 재능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그들의 재능에 성의를 표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곳. 

사람의 손을 거치는 것은 꼭 그에 대한 값을 지불해야 하는 곳. 한국에서는 수제품,  식당 서비스, 하물며 길 위의 버스커의 공연까지. 사람의 손을 거친 것에 흥정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이곳에서 살아보니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언젠가 먼 미래에 더 멋진 사람이 되어 다시 돌아와야겠다는 확신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바뀔 때면, 이 도시는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너는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거야'라는 풍경을 보란 듯이 보여주었다.


오늘도 사랑스러운 도시의 풍경에 흠뻑 빠져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바이올린 소리에 이끌려 내가 좋아하는 트라팔가 스퀘어에 들어섰다. 나는 그 연주 앞에서 발을 뗄 수 없었고, 평생 들어본 적이 없는 감동적인 연주에 목이 메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곳에서 지내온 시간들, 일상이 되어버린, 이제는 추억이 너무 많아져서 곱씹는 것조차도 가물가물해지는 추억들이 쌓여버린, 그 모든 시간들이 짧은 연주 시간 동안 필름처럼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오래된 것일수록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는 이곳에서. 옛것을 끔찍이도 소중히 여기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 도시의 거리에서,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과거를 나를 추억하고 현재의 나를 보고 놀라워한다.


나도 알지 못하는 나의 장점을 알아봐 주는 곳.


좋아하는 게 없다고 말하던, 특별히 잘하는 게 없어서 이러한 밥벌이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던 내가,

이제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아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하고 싶은 것 원 없이 하고 한국에 돌아가면 현실에 순응하고 살자고 오게 된 런던인데 자꾸만 새로운 꿈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나고 없어지기를 반복한다.



언젠가 어학원에서 "런던에 올 때 가지고 온 것과 본국에 돌아갈 때 런던에서 꼭 이것만은 가지고 가고 싶은 것"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런던에 올 때 다들 아무 생각 없이 혹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왔다는 대답이 대다수였다. 


러시아에서 온 A는 식당이든 어디서든 모르는 사람들과 자연스레 Small talk 하는 것을 즐기는 문화를, 프랑스에서 온 나의 절친 E는 공원과 다양한 문화를, 나는 값싸고 다양한 식재료 천국인 슈퍼마켓을 가지고 가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우린 이곳에서 각자 다른 기간을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생각했던 것 그 이상의 무언가를, 

가슴 뛰게 할 무엇인가를 찾았고, 국적 불문하고 우리가 정말로 가지고 돌아가고 싶은 것은


나답게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나 조차도 몰랐던 나의 "가능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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