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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ARANTH Dec 29. 2018

오늘이 런던에서 가장 슬펐던 날

런던에서 바쁘기로 유명한 역이라면 손에 꼽히는 워털루 역. 

지하철역과 기차역이 함께 있고, 더불어 런던 곳곳으로 뻗어가는 버스정류장도 여러 개 있어서 아침이면 출근하는 사람들, 학생들, 여행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사람들이 많아서, 매일 바빠서 나는 이 역이 좋았다.  

이 사람들 사이에 나도 스며들어서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그 바쁜 인파 속에 빨간색 조끼를 입고 신문을 한 아름 안고 우두커니 서있는 사람이 있다.

무료 신문을 나눠주는 아주머니 혹은 아저씨. 영어 공부를 한답시고 매일매일 신문을 받아가는 일이 아침 학원가는 길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여느 때처럼 신문을 받기 위해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던 날.



신문을 받아 들자마자 기계적으로 Thank you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랬는데 내 등 뒤에서 Have a nice day라는 인사가 들린다.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며 활짝 웃고 계시길래 

나도 "Have a nice day."라고 답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좋은 하루 돼!"라는 말. 한국 회사에서 전화친절 교육을 할 때면 꼭 끝인사로 붙이라고 했던 말. 

가뜩이나 경상도 애교 없는 여자에게 그 말은 차마 어색해서 너무나도 하기 힘든 말이었는데, 이곳에서는 그 말이 입에 착착 감길 정도로 너무 좋다. 친구들에게도, 길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에게도, 슈퍼마켓 점원에게도. 그 좋은 하루 되라는 말을 정말 많이 하고 있다. 말의 힘이라고 할까, 그 인사를 하고 나면, 혹은 그 인사를 받고 나면 정말로 마법처럼 기분이 좋아졌고 하루 종일 좋은 일들만 가득 생길 것만 같았다.


이곳에서의 매일은 하루도 좋은 하루가 아니었던 날이 없었는데, 

오늘은 그중 예외인 하루였던 거 같다.



다이어리에 날짜를 적다가 정말 이곳에서 머무를 날이, 이 방에서 공부하고, 일기를 쓰고 있을 날이 10일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꼭 남자 친구랑 계약연애를 하고 종료를 앞둔 사람 같았다. 그 마음이 그대로 기록된 sns 일기장에 달린 나의 오랜 독자님의 메시지와 회사 동기 언니의 안부 인사로 아침부터 코끝이 찡했다.


'님은 참 행복하십니다. 사랑하는 어머님이 건강하게 계심에, 님의 몸과 마음이 참 건강해서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에. 인생에 있어 참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실천하고 계심에. 다시는 절대 똑같이 재현될 수 없는 평생 잊지 못할 하루하루를 살았던 추억을 만들고 계심에. 평생 잊지 못할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만나고 각각의 추억을 만듦에. 다시 한국에 돌아가도 바로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기에. 또 이런 것들을 소중하게 느끼고 간직할 수 있는 마음이 있기에. 님은 참 행복하십니다. 승리자입니다. 평생 후회하지 않을 젊은 시절을 보내고 계십니다. 남은 며칠 조금의 시간이라도 아끼어 단 한 명과라도 단 한 번의 이벤트라도 더 만들어 평생 간직할 향기로운 추억을 만들고 오시길 바랍니다.'


' J. 이제 며칠 안 남았지. 인스타 보면 저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는데, 너무 아깝다. 남은 기간 마지막 일분까지 아낌없이 눈과 마음에 담고 건강히 돌아와라.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이번에 돌아온대도 설마 그게 끝이겠나 어디로 튈지 또 무슨 도전을 벌일지 모르는 넌데. 그래 이게 나다 어쩔래 하고 살아라. 그런 널 응원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것을.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나았을 것을. 시작이 없었다면 끝이라는 것도 없을 덴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날씨도 정말 구리다. 비가 오지는 않았지만 정말 런던스러운 흐린 날씨다. 축축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학교에 가서도 쉽게 집중하지를 못했다.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낙엽이 수북이 쌓인 템즈강변을 걷다가 벤치에 잠시 앉았다. 날씨가 흐리니 바람도 제법 차가웠다. 멍하니 빅벤 종소리를 듣고 앉아 있다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평생 울어본 적 없는 소리로  통곡하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보고 가도 상관없었다.



이곳에서의 모든 일상이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오른쪽을 먼저 보는 것, 버스를 타면 당연하게 이층으로 올라가고, 

쏟아지는 인파 속을 요리저리 피해 다니는 요령도 늘었고, 

사람이 먼저니까 빨간 불이라도 차가 지나다니지 않는다면 무단 횡단하는 것, 

물론 차가 오더라도 알아서 멈춘다. 화장실 변기는 두 번 눌러서 물을 내리는 것, 


Sorry, Thank you, Excuse me를 입에 달고 사는 것, 

옆에 앉은 누군가가 재채기를 하면 모르는 사람일지언정 Bless you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마트 셀프 계산대에서  앞사람이 아무리 꾸무정 거려도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리기, 

식당에서든 펍에서든 옆 사람에게 말 걸어보기, 버스커에게 다가가서 말 걸어 보기,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걸어 다니면서 음식 먹기. 


그리고 이 도시를 너무 사랑해버렸다.


이 사랑스러운 도시는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런 것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해주고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알아봐 주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격려해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잠자는 시간을 시간을 줄여가며, 하루가 부족할 정도로 이 도시를 사랑했다. 매일매일 수십 장의 사진을 찍고, 하루를 일기장에 빼곡히 기록하면서도 여전히 모자라는 것 같아 열렬히 사랑했다.



정말 딱 6개월만 살고 미련 없이 돌아가려고 했는데, 너무 많은 추억들이 생겨버렸다. 

이 많은 추억을 이곳에 그대로 묻고 가야 한다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마음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가슴이 답답해서 당장 내일 죽을 사람처럼 울었다. 


아니 당장 내일 죽는 기분이었다. 

매일 같이 보던 이 풍경들이 곧 눈 앞에서 사라지는 순간이 온다는 게 정말 죽는 기분이었다. 


울다 보니 한 번도 그립지 않았던 엄마가 생각이 났다. 

한국은 지금 밤 11시.


통화 버튼을 누르니 엄마가 금방 전화를 받는다. 


엄마 목소리에 더 서러워졌다. 

엄마가 왜 울고 있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다시 마주해야 할 현실들에 대한 두려움, 

정말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는데 서서히 잊힐 이 시간들에 대한 억울함,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과 이 도시의 긍정적인 에너지, 

그 하루들과 사람들을 통해서 발견한 새로운 나의 모습과 또 다른 꿈들이

한꺼번에 사라질 것만 같은 불안함. 


이 실체 없는 무엇인가들을 내 손으로 어찌할 수 없어서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받아 들 수밖에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왜 내가 이십 대에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려고 했는지, 

독하게 살지 않아도 엄마한테는 조금은 이야기하고 살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하고. 


혼자 그렇게 독하게 살다 보니, 혼자 못 할 것이 없다고 믿고 그렇게 살았는데. 

그래서 눈물도 언제부터인가는 참고 살고. 그러다 보니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어졌었는데, 

이곳에서는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울었다고, 


이곳에서 살아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거 같다고. 


나는 참 외로운 사람이었다고 말이다. 



엄마는 미안하다고 하셨다. 

엄마가 먼저 손을 내밀었어야 하는데, 우리가 그땐 어떻게는 살아보려고, 먹고사는 것 하나만 보고 살다 보니 이렇게 된 거 같다고. 이제는 알았으니까 이십 대에 잘못된 것들을 삼십 대는 그러지 않고 살면 되는 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엄마랑 나랑 동생이랑 셋이서 화목하게 살자는 이야기도. 


한국에서의 삶이, 나의 이십 대가 나를 이렇게 독한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좋은 사람들도 여전히 내 주변에 많이 있다는 것도 잊지 말라고.


엄마도 나도 서로가 평생 동안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진심 어린 대화였다. 

엄마에게 나의 고민과 걱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기적이었고, 엄청난 변화였다.



늘 강한 장녀여야만 했다.  아니 스스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면 엄마가 속상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엄마에겐 바깥에 내어놓으면 불안한 마냥 어린 딸이었고나도 여전히 엄마라는 든든한 기둥이 필요한 딸이었다.


사회생활에서는 어리지만 어른처럼 행동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옆 동료들에게 피해는 물론 어려서 그렇다며 손가락질당할 것만 같았다. 내가 신규 직원일 때 주변에서 했던 말은 전혀 스무세 살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삼십 대가 되어 바라본 이십 대의 직원들은 너무나도 풋풋했고, 있는 그대로가 사랑스러웠다. 언젠가 직장 언니들이 이십 대엔 그래도 된다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때 그랬지 못했던 내가,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내가 아쉬웠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공부하고 일하고 있는 그곳에서 거의 나의 본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사회에서도. 그 누구도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만든 껍데기에 스스로 갇히게 만든 것은 나였음에도 늘 가족 탓, 주변 탓하며 그곳엔 내 편이 없다고, 하지만 런던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주는 사람들 많다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6개월 동안 참았던, 아니 어쩌면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시점부터 참아온 서러움들을

두 시간 동안 청승맞게 길바닥에서 다 쏟아내곤 집으로 돌아왔다.


바람에 얼어붙은 몸은 그대로 침대로 던져졌다. 

아무리 이불을 덮어보아도 시린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플랏 메이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창 밖에 봐봐요!"


그녀가 창밖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언니 왜 울어요. 울지 마. 근데 언니, 나도 오늘 울었어. 언니가 곧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슬펐어. 

맞아. 손으로 셀 수 없는 무한한 시간이었는데, 딱 하나의 정의로 그냥 6개월이라는 단어로 정의되는 게, 답이 내려진다는 게 참 무서워요.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어. 오늘도 요리해서 맛있는 술에, 눈물 펑펑 쏟을 영화 한 편 해요!"


런던에서 가장 슬펐던 그날 저녁. 

나는 평생 끊겨본 적이 없던 필름이 끊겨버렸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오늘은 내 방 큰 창문 너머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플랏 메이트 동생이 그랬다.

우리들의 하루는 어쩌면 눈뜨는 순간 정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아침에 버스를 놓치는 것도, 하루 종일 재수가 없는 것도,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은 것도

눈뜨는 순간 다 정해지는 거라고.


속이 후련한 것이 이곳에서의 또 다른 멋진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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