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IE & JACK 작은 상자

그 안에 사랑 있다

by 아마르기

안방 장롱 맨 위칸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은 상자가 하나 있다. 앙증맞은 꽃무늬가 그려져 있는 얇은 포장용 상자 안에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들어 있다.


집 안에 있는 물건 중에서도, 내 마음을 가장 많이 끌어당기는 건 이 상자일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을 꺼내어 보며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받은 사랑>

내가 외고 합격을 했을 때 아빠가 보내주신 전보이다.


아빠는 목포에서 연대장으로 일하고 계실 때였다. 90년대에는 교통도 그리 발달하지 않아 주말마다 아빠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끔 엄마가 목포로 내려가셨고, 우리는 몇 달에 한 번씩 아빠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군인 아빠.


아빠의 이름 앞에 '군인'이라는 글자를 붙이면 학창 시절 내가 가졌던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굳은 표정, 곧은 자세, 명령조의 말투. 가끔 무장해제하고 놀아주실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8-90년대 단단한 군인의 모습을 하고 계셨다.


아직도 아빠가 자주 하셨던 말씀이 귓가에 남는다. '군인이 전장에 나갈 때 총기를 점검하고 총알을 장전하듯 그런 마음으로 평소에 공부를 하고 시험에 임해야 한다'라고 가르치셨다.


그렇게 나에게 다소 '무서운' 이미지로 각인되었던 '군인 아빠'가 합격 축하 전보를 보내셨다.


'사랑하는 내 딸아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다시 이 문장을 읽으니 아빠가 얼마나 신중하게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셨을지 그 마음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사랑'


'내 딸'


'진심'


셋 중에 중간 아이로 태어난 나는 장남 오빠가 받는 인정이 부러웠고, 막둥이 여동생이 받는 무한한 사랑을 시기했다. 그리고 때로는 의심도 했다. 나는 주워온 아이일 지도 모른다고.


나도 세 아이를 낳고 보니 이제야 알 것 같다. 각각이 느끼는 결핍을 부모는 다 알고 있다. 부모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빈틈을 채워주려고 모든 마음을 담아 아이에게 알맞게 표현한다.


좀 늦게 깨달았지만 나는 이제 아빠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 전보 한 장이 내가 받은 아빠의 인정과 '사랑의 증거'이다.


<주는 사랑>

세 아이의 태내기 기록인 산모 아기 수첩이다.


지금은 18살, 17살, 14살이 된 세 딸들. 한창 자기주장이 강한 청소년들인지라 이젠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겠다'라는 표현이 선뜻 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여전히, 세상 끝날에 내가 눈 감을 때 가장 오래 보고 싶은 얼굴들이고, 그 모습 그대로 눈에 담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존재들이다.


신생아실에서 찼던 아기 손목 밴드, 저체온증 예방을 위해 썼던 간호사가 직접 뜬 털모자, 첫 아이 돌에 함께할 수 없어 아쉽고 슬픈 마음이 있었던 남편이 고른 여아 드레스. 우리 아이들을 돌봤던 눈길과 손길이 이 물건에 담겨 있다.


한때 나는 세 딸들이 세상에서 자랑스러운 인물로 자라나길 원했다. 공부 잘하는 똑똑한 상위 1프로의 아이들이 되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다. 속물스럽지만 대한민국 부모라면 보통 그렇지 않은가 하고 핑계를 대본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소망이 생겼다. 나는 아이들이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길 원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그리고 어떤 문제에 봉착하든 사랑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이마저도 욕심 같긴 하다. 그냥 요즘엔 세 딸들이 건강하게만 자랐으면 한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어른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게 내리사랑인가 보다.


<견디는 사랑>

이 어여쁜 젊은이들은 나와 남편이다.


곧 있으면 결혼 20주년이 된다. 나에게 10주년, 20주년 등 10년 단위의 주기는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10주년에는 사랑이 뜨거운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이 차가울 수도 있고, 열정보다는 인내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인내하는 사랑은 어려웠다. 타고난 열정과 나의 본능을 절제하는 훈련을 해야 했다. 때로는 실패하고 실수했다. 모진 말을 하며 다투기도 했다.


20주년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나는 부부간 사랑을 재배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첫 10년이 뜨거웠고, 그다음 10년은 차가웠다면, 앞으로는 미지근한 사랑을 해야겠다.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지켜주는 부부, 어쩌면 가장 편안한 온도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은 상자 안에 이렇게 소중한 사랑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는 것을 이 글을 쓰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빠에게서 받은 사랑, 내가 사랑하는 세 딸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여전히 어렵지만 지속가능한 남편과의 사랑이 있었다.


언젠가 이 안에 나머지 사랑 이야기가 들어간다면 어떨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완성된 사랑이 이 상자에 담길 것 같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