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굿바이
내가 버리지 못하고 집안 어디엔가 쌓아놓고, 잊은 채 살고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어 그 의미를 곱씹어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꽃무늬 한국도자기 접시를 제외하고 나머지 물건들은 거의 그 존재조차 기억하지 않고 사는 물건들이었다. 그렇지만 집안을 정리할 때에도,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할 때에도 늘 버리지 않고 20년 동안 데리고 온 것들이다.
호두색 버버리 코트는 나를 향한 엄마의 마음을, 선물용 작은 상자는 아빠로부터 받은 사랑과 나에게 소중한 하슬지와 남편을, 꽃무늬 접시는 죽음 그 이후에 남겨지는 기억을, 노트북은 내가 가졌던 꿈과 희망을, 오래된 티셔츠는 이방인에 대한 나의 인식을, 대학교재와 학위논문은 인생의 방향을 고민하게 해 주었다.
오늘은 웨딩사진을 창고에서 꺼내어 사진을 찍어 올리고 글을 쓰기 위해 이렇게 자리에 앉아 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데드라인을 지켜야 한다는 신실함도 필요하지만,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단 글쓰기의 시작을 지체하게 하는 심리적 방지턱을 넘어야 한다. 웨딩사진은 20년 간의 나의 결혼생활을 돌아봐야 하는 작업이라 꽤 오랫동안 글쓰기를 시작하기 어려웠다. 결혼생활이 만족스럽지 않고 후회가 많기 때문이다. 사소한 말다툼도 귀찮아 회피하기 일수고, 평행선처럼 살고 있어서였다.
언젠가부터 큰 딸이 묻기 시작했다.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요? 우리는 결혼적령기가 된 어느 시점에 우연히 교회 마당에서 만나게 되었고, 약간의 교제를 하고 바로 두 달 만에 결혼을 했다. 어떤 요인이 우리가 결혼을 신속하게 결정하고 이행하게 만들었을까? 나도 언젠가부터 그게 의문이었다.
적절한 조건이 맞았던 것은 사실이다. 대학교 동문이었고, 같은 교회 교인이었다. 남편은 대기업 연구원이었고, 그의 성격은 "그 형, 착해요."라는 우리 오빠의 말 한마디에 인격도 검증된 셈이었다. 두 달 만에 결혼하면서도 위험 요인의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어차피 나도, 그도 결혼'의식' 자체를 목표로 하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연애생활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남편의 여동생의 결혼식이 6개월 남은 시점에 우리는 마치 새치기를 하듯, 시아버지의 추진으로 그렇게 결혼식을 서둘러 치러버렸다.
'급할 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왜 그때는 마음에 새기지 못했을까? 11월에 만나고, 1월에 결혼을 한 우리는 20년 동안 살면서 참 많이도 싸우며 살았다. 겉모습과 조건만 맞추어보았지, 내적으로 서로 맞는 부분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 집에 합쳐져 살고 보니, 우리는 다른 게 너무도 많았다. 그 다른 점을 서로 비난하고 고치려 하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서로를 보완해 주는 부부가 아닌, 서로의 단점만 도드라져 얼룩덜룩한 누더기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20년 전 웨딩사진을 바라봤을 때 예전에 나는 그 사진 속의 여성이 '나'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젊고 귀엽고 예쁘고 활기차 보이는 28살 어린 여성과 그 옆에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년 같은 청년. 그 둘의 모습이 활짝 핀 꽃 두 송이 같아 보였고, 반면 문제를 해결하며 살기에 급급한 현실의 '나'는 처량해보이기만 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의 격차를 곱씹으며 얼마나 원망했던지.
하지만 오늘,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제 웨딩사진 속에 젊은 두 청년은 나와 남편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그동안, 나의 몸과 마음에는 그때의 것이 남아있지 않음을 이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더 이상 나의 피부는, 나의 눈동자는, 나의 오장육부는 그때의 것과 같지 않다. 나의 생각은, 나의 의지는, 나의 용기는 이제 다 소진되었다. 아이들에게 다 줘버리고 그저 껍데기와 눈물만 남아 있는 것 같다. 허탈감이 밀려오고 조금은 슬펐지만, 이상하게도 그 끝에서 또다른 감정이 반짝였다.
감사하다. 20년 전의 나를 떠나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사하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나는 '48살의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더 이상 20년 전의 나에 집착하며 그 모습을 되찾으려는 헛수고를 하지 않으련다. 또한 20년 전의 남편을 불러내어 다그치는 악처가 되지 않으련다. 그들은 이제 사라졌고, 오늘부터 48살의 나와 51살의 남편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