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나의 출산동기
나를 비롯한 모든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과목 중 하나라면 통계가 아닐까? 학부에서 고통받은것도 모자라 통계학을 또 필수과목으로 수강해야 한다는 사실에 나를 비롯한 모든 동기들이 절망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통계 교수님은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많아봐야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교수님은 슬랙스가 잘 어울리는 미인이셨는데, 명랑한 목소리에 에너지가 가득한 분이었다.
교수님은 통계가 얼마나 재밌는 부분이 많다는걸 보여주겠다며 눈을 반짝이며 시작하셨는데, 과연 이전에 알던 통계 수업과는 많이 달랐다. 실생활에 와닿는 예시들을 많이 사용해서 흥미를 유도하는 것은 물론이고(왕좌의 게임 에피소드 당 사망하는 캐릭터 수는 어떤 분포를 가지고 있을까?),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새로운 개념을 설명하고는 “Isn’t it beau-tiful?”하며 우리의 공감을 얻으려는 미소였다. 통계라는 학문을 너무 사랑해서 이 멋진 세계에 너희 모두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그 해맑음이 우리를 모두 무장해제시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그 세계에 푹 빠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학부때에 비해서 통계학을 공부하는 시간이 훨씬 즐거웠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너드미 있는 여자가 얼마나 귀여울 수 있는지!
교수님은 개인적인 예시도 많이 사용하다보니, 어느 날 수업 중 딸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녀가 나와 비슷한 시기인 몇 달 전에 출산을 하고 복귀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모두가 놀랐지만, 누구보다 놀라고 반가운 건 나였다. 호리호리한 체형도, 피곤에 찌든 티도 없이 대학생같은 표정으로 강의를 이어가는 교수님을 보면서 ‘미국 교수들은 육아휴직이 짧나?’, ‘지금 아이는 누가 보고있을까?’ 등등 여러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 궁금증은 학기 마지막 날 아기띠에 딸을 안은 채로 등장한 남편분을 통해 해소되었다. 역시 같은 학교 교수님인 남편분은 출산 후 이번 학기에 복귀하기로 한 아내 대신 육아휴직을 하고 아이를 돌보고 있다고 했다. 강의실 뒷편에서 교수님을 보는 남편분의 눈에서 애정과 지지가 느껴졌다. 갓 만난 우리에게도 보이는데, 남편분에게는 본인 전공에 대한 그녀의 엄청난 열정과 사랑이 얼마나 더 또렷이 보였을까.
늘 가진 생각이지만 딸을 키우면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직장을 가지고 사회인으로 살아온 성인 여성들이, 왜 엄마가 되면 모든 정체성에서 ‘엄마’가 우선시 되도록 강요받아야 하는지. 엄마의 희생을 보고 자란 딸들이 또 다른 엄마가 되길 망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일 수 밖에 없다. 그 누가 뻔히 나를 잃는 선택을 하고 싶을까? 최근에는 우리나라에도 육아휴직을 선택하는 아빠들이 많지만, 아직도 사회적 인식상 선뜻 선택하기에 쉬운 길은 아닌 것 같다.
교수님의 어린 딸은 엄마를 보며 멋진 어른, 멋진 엄마가 되는 자신을 꿈꾸게 될 것이다. 나는 교수님처럼 ‘40대 이하 주목할만한 젊은 교수 TOP 40’ 같은 성취와는 거리가 멀지만, 엄마로서의 삶도, 한 인간으로서의 삶도 잘 일구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 다짐해보는 순간이었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공존할 수 있는 삶이라고. 그리고 노력할 가치가 있는 무한한 행복을 주는 일이라고도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