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와 추천서를 작성하며 발견한 나
이제 시험 점수를 들고 학교를 택해 지원을 할 차례였다. 미국 MBA의 경우 보통 세 번에 걸쳐 모집을 하지만, 나는 늦게 준비를 시작해서 1차는 지원하지 못하고 3차는 출산 예정기간과 겹치므로 2차에서 무조건 어디든 합격해야했다.
Resume도 작성해본 적이 없으니 인터넷에서 탑 MBA Resume라는 것들을 다운받아봤다. 한 장짜리 resume에 화려한 이력들이 빼곡히 들어차서 여백이 없을 지경이었다. 알만한 회사를 여러 개 거쳤거나 자기 회사를 차린 사람이 많았고, 국가대표로 올림픽까지 나갔다는 등 독특한 이력도 눈에 띄었다. 특이사항을 적는 란에는 여러 언어에 능하다거나 각종 자격증, 봉사활동 등이 주를 이루었다. 대학교 졸업 후 같은 직장만 쭉 다닌데다 특기나 눈에 띄는 취미도 없는 나는, 아직도 1/3정도 비어있는 resume 페이지의 깜박이는 커서를 보며 멍 때리는 날이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지원서를 작성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개인 기본정보부터 교육과 경력사항들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자세하게 입력하도록 되어있는데 중간중간 자주 막혔다. 여러 질문 중 direct report가 몇이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다 아는 단어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구글에 찾아보니 '나에게 보고하는 부하직원'이 몇 명인지 묻는 질문이었다.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이 회사에 있는 한 여러 해 동안 나에게 보고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0~10+까지 있는 스크롤바에서 '0'이 쉽게 눌러지지 않았다.
에세이는 '이 학교를 왜 선택했는지, 또 학교는 왜 당신을 선택해야 하는지'라던가 '현재 열정적으로 임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1~2페이지 가량 쓰도록 되어있는데, 어느 질문이든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K-학원의 힘으로 얻어낸 시험점수가 비슷하다는 점 빼고 다른 학생들보다 내가 낫다고 주장할 만할 근거를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졸업 후 성실하고 꾸준하게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난 아무것도 볼게 없는 사람인 것 같이 초라한 기분이었다.
아무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지원서와 에세이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나와 일했던 사람 2명에게 추천서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나와 한 번 이상 서로 다른 파트에서 일한 경험이 있던 현 상사와 전 상사분께 추천서를 부탁했다. 영어로 써야하므로 미리 내가 작성해서 보여드리고 의견을 주시면 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내 상사분은 네가 편한대로 하라면서,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지난 업무를 같이 할 때 이런 부분이 인상적이었다며, 추천서에 꼭 적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싶을 정도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일이었는데 그 분은 꽤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몇 년 전의 나, 꽤 기특했네, 하면서 얼떨떨한 기분으로 인사를 하고 자리에 돌아왔다. 갑자기 몇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서 최종본으로 저장했던 에세이를 다시 열어서 고쳐썼다.
MBA를 이수하는 학생들 대부분은 다른 직종, 다른 회사로 이직을 꿈꾼다. 요즘 제일 인기있는 직군은 역시 구글, 아마존 등 Big tech의 Product Manager(PM)이라고 한다. PM이 뭔데? 라고 물어보니 맡은 상품/서비스를 고객, 경쟁자 등의 동향을 바탕으로 개발자와 협력하여 새롭게 기획하고 개선하는 일을 주로 담당한다고 한다. 듣다보니 그거 내가 하던 일인데? 물론 그런 화려한 회사는 아니지만, 친구들은 나의 경험을 궁금해하고 듣고싶어 했다. 어떤 프로세스로 일을 했는지, 어떤 점이 어려웠는지, 어떻게 극복했는지 등. 얘기를 하다 보니 새삼 꽤 많은 일을 거쳐왔고 꽤 흥미로운 일도 했구나 싶었다.
일은 그냥 돈 벌려고 하는 거라며, 즐거움은 회사 밖에서 찾으라면서 업무에 무관심한 것을 쿨한 사람인 양 굴어왔는데, 입학을 준비하고 학교를 다니면서 내 지난 업무와 지난 시간에 대해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회사를 떠나고 나니 내 일을 조금 좋아하게 된 것이다. 물론 다시 일을 시작하면 자괴감이 드는 순간들이 분명 다시 찾아오겠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조금 다른 감정으로 힘든 고비를 넘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