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모든 면에서 완벽한 영웅의 모습은 경외감을 느끼게 만들지만, 영웅과 평범한 우리를 확연히 구분 짓게 한다. 위인전에서는 독자보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며 영웅의 훌륭한(완전무결한) 모습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우리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므로 독자 스스로 영웅이 되기를 포기하게 된다. 영웅의 자질이 1도 없음을 스스로 느끼므로. 달성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목표라면 사람은 노력할 수 있다지만 그 목표가 죽었다 깨어나도 달성할 수 없으면 바로 포기하듯이.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면의 죽음을 알아챈 종사관과 군관들은 내 앞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옆방에는 종사관 김수철이 보고 서류를 부스럭거리고 있었고 마루 밖 댓돌 앞에는 창을 쥔 위병이 번을 서고 있었다.
저녁때 숙소를 나와 갯가 염전으로 갔다. 종사관과 당번 군관을 물리치고 혼자서 갔다. 낡은 소금 창고들이 노을에 잠겨있었다. 나는 소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나는 겨우 숨죽여 울었다. 적들은 오지 않았다.
≪칼의 노래 - 김훈≫
저자는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와 다른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장군의 인간적인 면을 강조한 ‘소설’을 썼다. 이 소설의 장군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일상에서는 연로한 노모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며 자식의 죽음에 혼자 어두운 창고에 숨어 숨죽여 흐느낀다. 밤이면 고문당한 자리가 아파 뜨거운 온돌바닥에 몸을 지지며 밤새 식은땀을 흘린다. 직장에서는 의견이 맞지 않는 동료와 다투기도 하고 일기장에 그 사람을 흉보는 말을 적기도 한다. 몰락한 수군을 보며 좌절감을 느끼며 중대한 결정의 순간에는 고민하고 망설이는 초조한 모습도 보인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호방하고 유쾌한 영웅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이 소설의 장군은 남들보다 조금 고집 세고 꼼꼼하며, 마음이 맞지 않는 동료와 자주 다투고, 겉으로는 감정표현을 덜 하는 사람이다. 흔히 우리가 하는 심리테스트에서 나는 ‘가끔 고집이 세다 ‘, ’ 계획을 세우고 꼼꼼한 편이다 ‘라고 대답할 수 있듯이 말이다.
영웅은 이미 완성형이지만 이 소설의 장군은 평범한 인간이기에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왜란 초기에 전라좌수사로서 수군을 이끌 때는 경상우수사 원균과 자주 갈등을 빚었고 결국에는 모함으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조선 수군도 괴멸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명나라의 진린 제독과 같이 행동할 때는 원균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전공(戰功)을 모두 진린에게 돌려서 호감을 사는 동시에 군기를 확립하여 명나라 수군을 통제한다. 전쟁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소극적인 명나라 수군을 기어코 전쟁터에 끌어내어 활용하는 등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유연하고 노련하게 상대를 구워삶는 모습을 보여준다.
살아오며 여러 일로 슬퍼하고 좌절하고 직장에서는 동료와 다투고 어려운 결정에 고민하고 망설인 적이 있는가? 처음엔 실수로 어려움을 겪지만, 비슷한 상황이 다시 발생하면 무난하게 대처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감히 영웅의 자질을 갖추고 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