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가득했던 마음속의 공간, 모두에게 있다면
남편과 첫 신혼집을 시작한 곳은 노원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였다.
아파트 앞에는 기차가 멈춘 철길 따라 공원이 있었고 은행나무가 아파트 단지마다
나의 허리보다 굵은 둘레의 나무들이 곳곳에 숲처럼 우거진 곳이었다.
집을 처음으로 보러 갔을 때 가을이었다.
베란다 너머로는 노란빛 은행나무가 창 전체를 가릴 정도로 30년여의 세월을
가을을 맞이하여 더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그 나무를 바라보기 좋고 햇살이 거실 가득히 들어찼다. 그 모습이 참 따뜻하고 좋았다.
노랑의 따스함이 감성을 풍부하게 해주는 느낌이기도 했다.
아파트의 바닥의 돌들은 비가 차면 웅덩이가 되기도 했지만 난 그 웅덩이를 보며 더 깊은 감상에 빠졌다.
어릴 때, 아버지의 어려운 일로 10살부터 지하방에 살게 되었었는데 그때부터 햇살 좋은 집에 대한 아릿한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 모른다. 집이 어려우기 전에 살았던 아파트에는 복도도 있고 햇볕이 잘 드는 큰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따스한 품에 안기듯 그 밝은 집의 풍경에 빠져들었다.
그 집은 오래된 집이었지만 꽤 튼튼했고 오래된 복도식 통로를 지나면서
이웃집의 풍경도 잠시 엿볼 수 있는 구조였다.
복도식 아파트의 살게 되면 대부분이 봄, 여름철에는 문을 열어두는 편인데 옆집의 소리가 아주 잘 들리는 편이었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그 옆집 소리를 들으면서 드라마 콩트 같은 극도 서로 만들면서 농담도 하고 그랬다.
그렇게 그 아파트 사는 것에 정이 들었다. 사랑이 가득해지면 정이 드는 것처럼 말이다.
눈이 내리면 복도 바로 앞에서 보는 오래된 놀이터 풍경도 정겨웠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내가 살았던 그곳을 또 떠올렸는지 모른다.
눈이 쌓이면 발자국이 폭폭 찍힌 그 작은 흙과 눈이 섞인 그곳의 터치가 물감의 잔상처럼 보였다.
아파트에 살면서 샀던 시집이 있었다. 마종기 시인의 "안 보이는 나라의 사랑"의 시집이다.
외국에 떨어져 사는 이민자로서의 어떤 사물과 풍경에 상응하여 그리움을
사랑으로서 그려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 또한 어릴 때 기억을 마종기 시인이 바라보고자 했던 마음으로
주변의 풍경을 사랑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게 은행나무가 가득한 풍경은 어릴 적 큰 나무를 경외하던 마음이었고
눈이 쌓인 놀이터는 온몸이 얼어도 모를 뜨겁게 놀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몸으로 부딪혔기 때문에 더 사랑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종기 시인의 <즐겨 듣던 음악이>라는 시를 좋아한다.
즐겨 듣던 음악이 나무가 되어
수천만의 밝고 싱싱한 잎을 흔들면
구식의 서양 하늘을 높이 떠나는 새처럼
떠나다오, 내가 그늘에 안주하기 전
더 많은 나무가 모여 아우성치는 숲으로.
즐겨 듣던 음악이 번개가 되어
추운 밤의 창가에서 불을 밝히면
보인다, 어색하던 그 밤의 인성의 불,
우리들의 건물은 숨은 손끝에 뜨거워지고
눈에는 눈, 가벼운 구름에는 가벼운 구름
전신으로 마찰하며 소리 나던 불.
[즐겨 듣던 음악이 - 마종기시인]
"저 밝게 환히 웃는 은행나무의 빛깔이 나의 옛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애틋하게 하는구나" 싶으며
가을저녁 밤 마종기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글을 적어본다.
햇살 가득했던 공간과 기억, 모두에게 그런 공간은 하나쯤 있지 않을까?
그런 그리움이 좋다. 나의 갈망은 언제나 소박하고 한결같다.
스스로 빛을 밝히는 그런 존재면 된다.
메를로 퐁티의 책 중에 이런 글이 있다.
"일상의 경험을 쌓으며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세상이 우리를 뚫고 우리를 지나가며 우리에게 흔적을 남긴다"
글을 쓰면서 회상하고 또 한 번 남겨보는 것, 그만큼 흔적을 남기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은 참 소중하다.
모두 각자에게 햇살 가득했던 공간의 기억이 있길 바란다.
그런 그리움이 좋다 글
난
라는 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