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렌트 계약을 돌이킬 순 없었다. 부동산 에이전트는 당분간 매물이 없다 하지, 이사업체는 다음 주면 델리에 짐이 들어온다 하지, 이 와중에 계약을 엎은다 한들어디 한번 죽도록 고생해보자밖에 더 되겠는가. 어딘지 모르게 교활하고 소름 끼치는 집주인의 행동만 놓고 보면 지금이라도 얼른 도망치는 게 신상에 좋겠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정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있는 놈들이 더하다는 말은 만국 공통이다. 집주인은 근방에 아파트를 몇 채나 가진 부자이면서도 어느 하나 자기 돈 쓰기 싫어서 모든 걸 세입자에게 미루는 지독한 스크루지 영감이었다. 4월 중순 처음으로 집을 보러 갔을 때 쥐가 돌아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더러운 집안 꼴을 둘러보며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기본 옵션을 요구했다. 방충망, 석회수 필터, 입주청소, 고장 난 전등, 벽에 뚫린 구멍, 잠기지 않는 현관 열쇠. 집주인이라면 응당 매물을 내놓기 전에처리했어야 할 사항을 내가 요구할 때까지 가만히 손 놓고 있는 것부터가 불안했다.
첫 만남에서는 나의 요구에 흔쾌히 동의해놓고 꼴랑 하루 지나 말을 바꿨다. 생각해보니 방충망은 비싸서 달아줄 수 없다는 것이다. 뎅기와 말라리아가 판을 치는데 방충망 없이 환기를 하라고? 이번 만큼은 절대 넘어갈 수 없었다. 무조건 달아달라 강력히 맞섰고 결국 쥘부채처럼 접었다 펼 수 있는 허접스러운 방충망을 거실과 부엌에 딱 한 칸씩만 설치해줬다. 별 인정머리 없는 인간을 다 보겠다며 욕하고 말았는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입주까지 남은 2주 동안 어찌나 사람을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드는지 그 양반 아주 재주도 좋다. 이삿날 전까지 첫 달 렌트비를 입금하겠다 약속했는데도 내가 널 어떻게 믿냐며 당장 세 달치를 내놓으라 성화였다. 그러더니 이사를일주일 앞둔 일요일, 사인까지 다 끝난 계약서를 두고 갑자기 조항을 바꿨다며 게스트하우스까지 사람을 보냈다. 도대체 뭐가 그리 맘에 안 들어 이 난리를 피우나 도무지 곱게 봐주려야 봐줄 수가 없었다.
수정했다는 임대계약서 파일을 켜놓고 하나씩 뜯어보는데 한숨이 푹- 나온다. 징글징글한 인간이다. 가볍게 수정한 정도가 아니라 조항 31개 중 절반을 시뻘건 줄로 고쳐놨다. 여유로운 일요일 오후 따위 개나 줘버리고 장시간 노트북 화면에시달려 침침해진 눈을 꿈뻑이며 계약서를 뜯어봤다. 어디를 어떻게 고쳤다는 건지 낱낱이 읽어주겠어, 온 힘을 다해 집중하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
계약조건으로 합의한 내용을 슬그머니 바꿔놨다. 심지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관리비에 포함되어야 할 수도세와 공용공간 전기세까지 세입자 부담으로 고쳐놓은 건 애교 수준이다. 이것도 세입자 탓, 저것도 세입자 탓, 모든 돈 나갈 일은 세입자가 알아서 해결해라 식으로 내용을 싹 다 바꿔 놓은 것이다.애초부터합의가 끝난 내용을 상의도 없이 변경한계약서에 곱게 사인할 거라 생각했다면나를 얼마나 호갱으로 본 건지 알 만하다.
이 동네는 관리비에 수도세가 포함되어 집주인이 내는 게 관습이다. 어느덧 20년을 살았다는 한국인 G는 단 한 번도 수도세를 낸 적이 없어 금액조차 모른다는데 감히 나한테 수도세를 덤탱이 씌워? 집도빌려줄 만큼 빌려줘 본 영감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어린 한국인이 덥석 집을 물어가니 뼛속까지 발라먹으려고 작정했던 걸까.어디서 되지도 않는 수작을 부리고 있어. 영감탱이가 사람을 한참 잘못 봤네.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씩씩거리다 외려 오기가 바싹 올랐다.
결국 10장이 넘는 계약서를 하나하나 쥐잡듯이 읽어가며 불합리한 부분을 골라내고 원래 계약 조건대로 수정하라 따졌다. 그랬더니 집주인 반응이 더 기가 찬다. 순수히 OK 하며 고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은, 세입자가 조항이 이상하다는 걸 발견 못 하면 얼씨구나 구렁이처럼 넘어가고, 아쉽게도 발견해서 따져 물으면 원래대로 고칠 요량이었던 게지. 아찔하다 아찔해.
입주 전까지는 엉망진창 계약서로 사람 피를 마르게 하더니 입주 날부터는 또 다른 차원으로 이마를 짚게 만든다. 참으로 대단한 집주인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