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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감한 망고 May 21. 2022

나는 부자가 아니라고!

한국 촌놈의 인도 상륙 76일차(2022.05.21)

생각보다 일찍 폭발하고 말았다. 언제고 한번은 언성이 높아지겠거니 짐작했지만 적어도 한 달은 버틸 줄 알았다. 이삿짐이 엉뚱한 곳으로 가고, 냉장고를 분해하고, 전기와 가스가 끊기고, 개미와 도마뱀이 나오고, 입주청소를 해놨다는 집구석먼지에 파묻혀 있어도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여기는 인도니까. 그렇지만 제 아무리 인도라 해도 도저히 눈 감아 줄 수 없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사 당일, 아파트 로비맨이 말하길 바로 다음날 일일 청소부 아야가 올 거라 했다. 요청한 적 없는 청소부를 누가 알아서 고용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이 아파트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라고만 생각했다. 먼지 날리는 집을 혼자 쓸고 닦는 것보다야 모쪼록 일손이 생기면 훨씬 낫겠지 싶어 일단 알겠다고 했다.


정확히 몇 시에 온다는 건지, 어떤 사람이 온다는 건지 관리인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애매한 상황이었지만 원래 이 동네 일처리가 다 그 모양이라 그러려니 넘어갔다. 그저 '아야가 온다'는 사실 하나만 통보받은 채 이튿날이 밝았다.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통 연락이 없길래 기다리다 지쳐 로비맨에게 물었더니 지금 전화해 보겠단다. 아침에 온다던 아야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설명 한 마디 없이 1시 반쯤 도착할 거라는 말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집에 올라갔고 2시가 넘어서야 초인종이 울렸다.

당신이 일일 아야가 맞느냐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을 도통 알아먹을 수 없었다. 그녀는 영어를 못하고 나는 벵갈어를 못하니 '손짓 발짓 몸으로 말해요' 게임의 시작이다. 아쉬운 대로 급하게 구글 앱을 켜놓고 영어-벵갈어 번역기를 돌리는데 영 개판으로 옮기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다. 결국 직접 청소하는 행동을 보여주며 그대로 따라 하게끔 알려줬다. 빗자루로 바닥 쓸고, 밀대로 걸레질하고, 손걸레로 변기 닦는 모습을 마치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기했다.

시간약속이란 개념이 무색할 만치 늦게 온 건 차치하고, 4시간 동안 꼼꼼하게 해 준다더니 1시간도 못 채우고 자기는 다 했다며 멀뚱멀뚱 서 있는 모습을 보고 황당했다. 시키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경고가 이걸 두고 한 말이었구나, 뒷골이 짜릿하게 당겼지만 침착하게 다른 청소거리를 지시했다. 그러나 더러운 물에 걸레를 푹 담가 대충 비틀어 짜내는 모습을 보고 차라리 시키지 말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여전히 방 곳곳을 굴러다니는 떡먼지와 거실 바닥에 허옇게 말라붙은 땟국물 자국을 보며 속이 쓰렸지만 일단 돈을 지불하고 빨리 내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오늘 일한 거, 얼마 줄까요? 원하는 금액을 말해봐요. 마저도 알아듣지 못해 멀뚱거리다가 실쭉실쭉 웃는 모습이 하도 답답해서 내쪽에서 먼저 500루피를 내밀었다. 500루피면 한화로 8천 원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오늘처럼 허술한 청소 퀄리티에는 분에 넘치게 큰 금액이었다. 영어 못 하는 아야하루 4시간씩 매일 부를 때 한 달 임금이 약 8만 원인 것을 생각하면 12시간 어치에 맞먹는 큰돈을 건넨 셈이다.

500루피를 보자마자 불만스러운 얼굴로 뭐라 뭐라 말하는데 번역기도 무용지물이었다. 아야는 이미 로비맨과 아는 사이였는지 자연스럽게 그에게 전화를 걸어 나에게 넘겨줬다. 이날은 인도의 휴일이라 원래 청소하던 아야가 못 나와 특별히 너를 위해 왔다는 둥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이고는 1,500루피(24,000원)를 불렀다. 인내심이 바닥을 치는 순간이었다.

당장 따라오라고, 아야와 함께 로비로 내려갔다. 말은 안 통해도 눈치는 빨라서 나의 상기된 표정과 단호한 어투에 살짝 겁을 먹은 듯했다. 데스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로비맨에게 어떻게 그 가격을 부를 수 있는지 설명해보라 했다. 나로서는 화를 내지 않고 좋게 마무리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돈을 주기로 하고 불렀으니 줘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한국인의 불같은 성깔을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지금 외국인이라고 바가지 씌우는 거 모를 것 같아? 나는 부자가 아니라고! 쇼미 더 머니 뺨 싸대기 후려칠 속사포 랩으로 구구절절 쏟아내는 나를 보며 흠칫 놀란 로비맨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기나긴 일장연설을 들어야 했다. 외국인이다 하면 그저 지갑 벗겨먹을 궁리만 하는 끈질긴 행태에 넌덜머리가 났다. 자신이 일한 몫보다 큰돈을 줬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니 더 이상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 쉬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 나는 내 집으로 올라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엘리베이터를 타버렸다. 로비맨은 민망하고 멋쩍은 얼굴로 사과 아닌 사과를 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아야에게 무어라 전달했다.

멱살 잡고 주먹질한 건 아니지만 인도에서 맞붙은 초유의 기싸움이었다. 이 참에 제대로 바로잡지 않으면 틀림없이 사는 내내 호갱 잡히기밖에 더하겠나 싶어 그동안 참고 참았던 억울함을 와르르 터뜨려버렸다.


이 동네에 살다 보면 화를 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순간이 있다. 답답하고 억울할 때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인도에서 불교가 싹 튼 이유가 혹시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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