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케(Thik Hai). 이보다 역설적인 힌디어가 있을까. 좋다. 알겠다. 괜찮다. 단어가 품은 온갖 긍정의 뜻이 무색할 만큼 골때리는 녀석이다.
티케의 시작은 믿음이었다. 이방인의 눈에는 그저 모든 게 신기했다. 내가 무엇을 요청하든 아무 문제 없다며 호기롭게 답하는 인도인의 티케에 조금은 반했는지도 모른다. 말끝을 흐리는 뜨뜻미지근한 대답보다 차라리 자신감 넘치는 오케이가 듬직하게 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원한 대답만큼이나 시원한 일처리를 기대했다.
예산에 맞는 좋은 집 좀 찾아주세요. 부동산 업자가 말했다. “티케.”
RO워터 설치와 입주청소를 서둘러주세요. 집주인 할아버지가 말했다. “티케.”
내일까지는 꼭 인터넷을 연결해주세요. 통신사 직원이 말했다. “티케.”
약속한 날짜에 식탁을 배송해주세요. 가구점 주인장이 말했다. “티케.”
그들은 하나같이 티케를, 그것도 족히 스무 번은 외쳤다. 위풍당당한 티케 세레나데에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음을 내어줬다. 사랑에 빠진 이방인에게 돌아온 건 처참한 결과였다.
부동산 업자는 매번 예산을 넘는 비싼 집으로만 골라왔다.
집주인 할아버지는 입주 당일까지도 RO워터 설치와 청소를 해놓지 않았다.
통신사 직원은 무려 닷새가 지나서야 인터넷을 연결해줬다.
가구점 주인장은 약속한 날짜보다 나흘 늦게 식탁을 보내줬다.
모든 것을 핑크빛으로만 바라보고 싶은 철없는 사랑을 가리가리 찢어놓은 티케였다. 짐짓 자신 있는 체하며 나를 기만한 상대의 꼼수와 늑장에 분노가 용솟음쳤다. 어떻게 이토록 사람을 질리게 만들 수 있는가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티케는 불신이 되었다. 나의 요구에 망설임 없이 티케가 돌아오면 기어코 수차례 반복해서 확인하고야 마는 고약한 습관이 생겼다. 그 모양새가 마치 귀 어두운 괴팍한 노인이 동네 사람 옷자락 붙잡고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는 것마냥 고집스러웠다. 스스로 질려버릴 만큼 상대를 잡도리해도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토요일 2시로 진료 예약된 거 맞죠? 토요일 2시죠? 간호사가 말했다. “티케.”
추가비용 안 붙는 거 확실하죠? 최종가격이죠? 미용사가 말했다. “티케.”
50루피에 신발 닦아주는 거 맞죠? 50루피죠? 구두닦이가 말했다. “티케.”
집에 와서 간염백신 놔주는 거죠? 집 맞죠? 병원 접수원이 말했다. “티케.”
그들은 여전히 티케를 외쳤다. 티케. 티케. 티케. 티케. 말끝마다 따발총처럼 따다다다 쏴대지만 역시나 결과는 티케하지 못했다.
간호사는 예약한 내역이 없다며 무조건 기다리라 말했다.
미용사는 상의 없이 샴푸와 드라이 비용을 더해 커트비를 불렀다.
구두닦이는 구둣솔을 내려놓자마자 50루피를 500루피로 둔갑시켰다.
병원 접수원은 의료인도 없이 얼음팩에 넣은 백신 유리병만 달랑 보냈다.
인도인의 티케 덕분에 어리숙한 이방인의 감정은 정신없이 요동친다. 손뼉 치며 웃어젖히는가 하면 삿대질하며 길길이 날뛰고, 남몰래 닭똥 눈물을 훔치는가 하면 세상천지 이보다 재미난 구경이 어딨냐며 낄낄거린다. 남부럽지 않은 희로애락이 마음껏 활개치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살아간다.
한때는 믿음, 곧이어 불신이 되어버린 티케. 인도살이도 어느덧 꽉 채운 6개월을 넘긴 지금, 티케는 어떤 의미로 흘러가고 있을까. 적응. 타협. 포기. 허세. 분노. 수많은 감정이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튀어 오른다. 인도인의 티케에 적응하며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포기한다. 특유의 깜찍한 허세를 너그럽게 받아주다가도 이따금씩 와락 분노를 터뜨린다. 가지각색 이야기가 차츰차츰 모여들어 이윽고 하나의 의미로 수렴한다.
티케, 그것은 그저 티케다. Alright. Fine. OK. 조금은 느려도 괜찮아. 조금은 잃어도 괜찮아. 조금은 참아도 괜찮아. 조금은 아파도 괜찮아. 인도인은 자꾸만 이방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씨익 웃는다. 이런 삶도 실은 꽤 괜찮지 않냐고, 그러니 이제 그만 같이 웃지 않겠냐고. 못 이기는 척 내 입꼬리도 슬그머니 하늘로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