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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감한 망고 Jun 19. 2024

멀쩡한 집이 없다

11.

인도 집은 뜯어볼수록 가관이다. 집 보러 다닐 때 받은 인상과 실제 들어가 살 때 오는 감상은 사뭇 달라 예기치 못한 문제가 끝도 없이 팡팡팡 튀어나온다. 어느 한 집만 그런 거라면 복불복을 운운하며 내 운이 모자랐다는 투정을 해볼 만도 하겠으나 나는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인도에서 '멀쩡한' 집에 살았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분명 아주 공통적인 난제다.


새로 온 집은 탁 트인 넓은 거실에 새로 칠한 크림색 페인트 벽이 마치 부잣집 부럽지 않은 럭셔리함을 자랑한다. 이전 집보다 평수가 작아 훨씬 아늑하고, 20층이 넘는 고층을 고른 덕에 문을 열면 거실과 주방을 내지르는 맞바람이 시원하다. 또 집주인이 전에 살던 사람을 위해 각 방에 아주 넉넉한 붙박이장을 해다 박은 점도 이 집을 고른 가장 큰 이유였다. 형편없는 위치와 접근성을 극복할 만큼 괜찮은 내부라 확신했다.


이사를 오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온 집안을 동영상과 사진으로 찍어 남기는 일이었다. 특히 나중에 짐을 뺄 때 문제가 될 만한 기존의 파손과 손상 부위는 각별히 신경을 썼다. 워낙에 인도 집주인이란 자들이 못돼 처먹은 갑부 놈들이 많아 세입자를 곱게 보내주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단단히 영상을 찍어 놔도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고 봐야 한다. 어쨌든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를 해야 하기에 편집증에 가까운 수준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22분짜리 영상으로 남겨두고 부동산 에이전트와 공유했다.


하루이틀 머물수록 영상 찍을 때는 미처 몰랐던 문제를 마주하게 되는데 그거 참 보면 볼수록 헛웃음이 나온다. 어느 날 화장실 세면대에 허리를 푹 숙이고 어푸어푸 세수를 하다가 유난히 왼쪽 허벅지만 툭툭 걸리는 서랍이 거슬렸다. 비누거품이 엉성하게 묻은 채로 실눈을 뜨고 아래를 바라보니 서랍장 왼쪽이 족히 5cm는 튀어나와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까짓 서랍 하나 제대로 못 끼워 맞추나 싶어 콧방귀를 끼다가 가만 보니 공부방 붙박이장도, 안방 여닫이문도, 부엌 하부장도 전부 어디 한 귀퉁이가 틀어졌음을 알아챘다. 결국 집안의 장이란 장은 죄다 어설픈 바보처럼 꾸겨넣었다는 소린데 이 아파트 브랜드가 세계가 알아주는 중동 부동산 개발사란 점에서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인도만 왔다 하면 누구라도 모지리 수준이 되고 마는 것일까.


페인트를 칠한 벽은 어찌나 연약한지 7단 사다리 한 번 잠시 세워 놨다고 벽이 깨지고 그 틈 사이에서 하얀 가루가 떨어져 나왔다. 쥘부채처럼 접었다 펴는 인도식 모기장은 얼마 못 가 주름이 뒤틀리고 프레임과 엇박자로 우그러졌다. 하이라이트는 에어컨이었는데 이사오자마자 에어컨을 틀었더니 탱크 지나가듯 덜덜덜덜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 기겁을 했다. 아파트 관리실에 고장을 신고한 뒤로 사람 둘이 올라와 드라이버로 천장 판때기 여섯 개를 분리해 냈고, 한 시간가량 이것저것 만져보더니 이제 되었다고 에어컨을 틀어 확인을 시켜줬다. 정말 놀랍게도 더 이상 탱크 소리는 나지 않았다. 숙제를 끝냈다는 개운한 마음으로 돌려보냈다.


다음날 저녁 다시 에어컨을 틀 때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탱크 소리가 돌아온 것이다.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 덜덜덜덜이냐 아찔했지만 재차 기사를 부르진 않았다. 부른다 한들 언제고 고장 날 수 있는 에어컨이라면 차라리 고치지 않고 사는 게 내 성격에 맞다.


이제 겨우 두 달이다. 습도가 80도에 다를 몬순과 미세먼지 AQI가 1,000에 달할 겨울, 무엇보다도 습하고 추운 벽에 올라올 흰 곰팡이를 상상하면 마른침이 꼴깍 넘어간다. 아직 이 집을 평가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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