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 오려고 준비하는 사람은 늘 걱정이 많다. 가장 극심한 공포를 자아내는 요소는 단연 공기질과 수질이다. 이 둘에 대해서는 인도에 조금 살아봤다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말이 넘쳐나는 판국이라 나 역시 얼마든지 겁을 줄 수 있다. 어떤 극단적인 사건까지 목격했는지 늘어 벌리며 겁을 주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겠으나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험한 내용이 아니다.
요새는 날이 더운 여름이 한창이라 공기질은 일 년 중 가장 좋은 편이다. 그러니 오늘은 수질 얘기나 해 보자. 나는 인도에 온 지 3년 차가 되었지만 한 번도 샤워기에 필터를 끼워본 적이 없다. 한국에서 필터를 바리바리 들고 오지도 않았고 인도에서 따로 구매하지도 않았다. 첫 번째 집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집도 화장실과 주방에서 그저 물이 나오는 대로 사용하고 있다. 하루 이틀 만에 수전 필터가 싯누런 흙색으로 변해버려 혐오스럽다는 바로 그 물로 머리를 감고, 몸을 닦고, 추운 겨울엔 어깨 담을 풀기 위해 반신욕까지 했다.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나야 할 상황이다. 남들 말대로라면 나는 매일 같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똥물을 끼얹고 있으니 이름 모를 피부병이나 수인성 질병을 달고 살아야 맞다. 그런데 이게 웬일. 내 몸 어디에도 그렇다 할 심각한 트러블이 생기지 않았다. 이 동네 수돗물 더러운 건 인도 토박이도 인정하는 공공연한 사실이라 아파트의 크기나 고급스러움에 관계없이 물만큼은 공평하게 더럽다. 그러니 내가 사는 집 물이 유난히 깨끗하다는 가설은 기각이다.
물론 이사 온 뒤 첫 해에만 결막염을 2번이나 앓았다. 평생 나 본 적이 없는 콩다래끼도 3번이나 돋아 눈 주위가 얼룩덜룩 붉은 흉으로 덮이기도 했다. 인도 안과를 들락날락하다 보면 겁이 날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필터를 달고 싶진 않았다. 플라스틱 필터를 단다 한들 며칠이나 버틸 것이며 흙색 물이 다시금 콸콸콸 나올 텐데 괜히 쓰레기나 양산하지 그게 무슨 소용일까. 마음의 위안일 뿐 실직적인 대책은 아니라는 생각에, 남의 나라에 와서 쓰레기만 잔뜩 버리고 갈 순 없다는 생각에, 무엇보다도 비싼 필터를 수십, 수백 개씩 쌓아놓고 살 순 없다는 생각에 수돗물을 그대로 사용했다.
대신 눈 점막에 자꾸 문제가 생기니 세수만큼은 작은 스텐 바가지에 주방 RO 필터 물을 받아 고양이 세수하듯 얼굴을 닦았다. 비록 얼마 못 가 흙찌꺼기가 고여 필터가 막히는 RO 정수기지만 그래도 수돗물보다는 깨끗한지 그 후로 결막염과 다래끼 올라오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던 중 새 집으로 이사를 왔고 이제는 주방에 바가지를 가져가 세숫물을 받아오는 것도 귀찮아져 냅다 수돗물로 세수까지 하게 되었다. 예라이 모르겠다, 나를 잡아 잡숫든가. 반신반의하며 씻기 시작했는데 물에서 흙냄새가 조금 나긴 하지만 큰 탈이 없으니 당분간은 그대로 살아도 좋겠다.
나의 운이 좋았다면 좋았다. 김 아무개처럼 왼쪽 이마빡에 흉측한 곰팡이가 필 수도 있었고 박 아무개처럼 알 수 없는 종기가 사춘기 여드름처럼 돋아날 수도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땐 그놈의 연약한 피부 때문에 온갖 잡스러운 병을 달고 살았던 내가 물 더럽기로 유명한 인도에서 이토록 멀쩡하게 잘 살다니 이런 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 기적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