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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Jul 22. 2022

속초의 한 음악카페에서

나의 여행 _15

큰 기대는 없었다. 밥을 먹었으니 습관처럼 커피를 마시러 가야겠는데 그 장소가 속초가 된 것 뿐이었다. 점심을 먹었던 시골 인제보다는 그래도 소도시인 속초에 갈만한 카페가 더 있을 것 같아서였다. 우리가 들어갈 숙소 주변에 마침 카페가 하나 있었고, 커피가 고팠던 나는 더 망설임 없이 거기서 커피 한 잔을 하기로 했다.


들어가보니 어라, 여기는 전에 몇 번 보았던 작은 규모의 카페와는 뭔가 안에 채워져 있는 것이 달랐다. 얼핏 보기엔 무슨 창고 같기도 했고 헌책방같기도 했던 그것은 음반들이었다. CD와 LP판이 가득 꽂힌 책장이 카페 한 켠에 무게감 있게 서 있었고, 카페 여기저기에는 오디오 장치가 가득했다. 나는 그제서야 이 카페가 지방 소도시에 흔하디 흔한 작은 개인 카페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주인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회색 헌팅캡을 쓰고 남색 티셔츠를 깔끔하게 차려 입은 초로의 카페 주인은 이 음악 카페 안에 있지 않았더라면 그냥 평범한 남자 한 명으로 보였을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기쁘거나 혹은 슬프거나 하는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았고 그 나이대의 남자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배가 약간 나와서 살짝 흘러내려 있었다. 키는 작지 않았으나 나이에 따른 노안은 어쩔 수 없는지 커피를 준비하거나 음악을 바꿀 때에는 돋보기를 꺼내 쓰곤 했다. 주문은 우리가 카운터에 직접 가서 했지만 커피는 그가 자리까지 손수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는  남편의 요청에 따라 옛날 가수인 해바라기의 LP판을 틀어주는 호의를 베풀기도 했다.

그는 어찌하여 늙음이 시작되는 그 즈음에 바닷가 작은 도시에 와서 음악 카페를 차려놓고 손님을 기다리게 되었을까. 그는 과연 무슨 일을 하며 젊음을 불태우다가 이곳 속초에 오게 된 것일까. 카페 한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음반들은 다 그가 젊은 시절부터 한 장 한 장 모아온 것이겠지. 음반마다 깃들어 있을 그의 사연은 어떤 것들일까. 훤칠했을 키가 구부정해지고, 늘씬했을 몸이 배가 나왔으며 저 헌팅캡은 혹시 탈모를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닐까 의심받는 나이가 된 지금, 아직도 그의 가슴에는 음반들을 차곡차곡 모을 때의 떨림과 설렘과 열정이 남아 있을까. 아직도 음악을 들을 때, LP판을 걸어놓고 삐걱대는 소리가 심장을 쿡 찌르면 그의 심장은 여전히 아플까 아니면 굳은 살이 박혀 무덤덤하기만 할까.

나는 카페 유리창 앞에 진열된, 어쩌면 그가 예전부터 사용해 왔던 것일지도 모를 구형 휴대폰들과 호출기, 심지어 망원경 따위를 아이와 찬찬히 살펴보며 그의 젊음에서부터 늙음까지를 상상해 보려 애썼다. 그는 단지 구경거리로 이 물건들을 진열해 놓은 것일까. 저 수많은 음반들을 모아온 것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을 게다. 그는 어쩌면 손님이 없는 비내리는 어느 오후에는 창가에 서서 휴대폰들을 바라보면서 휴대폰마다 담겨있을 그만의 추억과 일상과 사건들을 곱씹어 볼지도 모른다. 그에게 과거는, 젊은 날은 더이상 오지 않지만 놓치고 싶지도 않은 무엇이 아니었을까. 젊음의 추억은 때로는 낡고 고장난 휴대폰을 통해서만 되살아나는 것일수도 있으니.


나는 카페를 나오고서야 비로소 이 카페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오래된 음반과 고장난 휴대폰들이 있고서야 바닷가 작은 도시의 카페는 내게 이름을 기억할 만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이었다. 그가 카페 이름 Analog를 한글로 고집스럽게 '아나로그' 라고 병기해 둔 것을 보았다. '아나로그'라. 그래, 그래야 그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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