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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Aug 16. 2022

전주 한옥마을의 점 보는 스님

나의 여행_18

그녀를 스님이라고 부른 이유는 머리를 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머리를 깎으면 다 스님이냐? 물론 그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머리를 파르라니 깎고 회색 장삼을 걸친 여자를 보고 그녀가 비구니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스님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가 어느 절 어느 종파 소속인지, 아니 실제 스님인지 아니면 스님처럼 보이기 위해 머리를 깎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폭염주의보가 내린 한낮, 전주 한옥마을 어딘가에서 그녀를 보았다. 점집이며 타로집이 쭉 모여있는 거리였다. 점집마다 사람이 두엇 모여 있었는데 그녀의 점집에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렇지 않아도 남편과 점집 거리를 걸으며 손금 한번 봐볼까? 따위의 말을 하고 있었던 터라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리 와서 앉아 봐요. 잘 봐줄께."

그녀는 얼핏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으나 그 눈매는 꽤나 강해서 성질깨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곧 손님이 될 나에게 성질을 부릴 일은 없을 터, 나는 뭔가에 끌리듯이 그녀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리고 평소 습관대로 그녀의 용모와 주변 모습을 시간을 두고 찬찬히 뜯어 보았다.


점심시간이 막 지난 때라는 것을 그녀의 치아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아랫니 한쪽이 미처 빼내지 못한 고춧가루로 붉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더운 날 뭘 그리 맛나게 자셨을까 생각하며 그녀를 보니 눈썹이 그린 듯 가지런하다. 오호라, 문신이로구나. 머리카락은 포기했지만 눈썹은 포기하지 않은 그녀는 눈썹 부위에 마취크림을 바르고 문신액을 방울방울 새겨 넣을 때 무슨 마음이었을까.


내 생년월일시를 말해주고 그녀가 만세력을 보며 그것들을 분석 (하는지 하는 척 하는건지는 모르지만) 하는 동안 나는 주변을 좀더 살폈다. 벽에는 손금 5천원 관상 5천원 따위의 가격표가 분홍색으로 길게 붙어 호객을 하고 있었고, 책상 한켠에는 인형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책을 펼쳐들고 있는 동자승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울리지 않게도 미키, 아니 리본을 맨 미니마우스였다.


이 인형들은 어디서 갖고와서 이렇게 그녀가 점을 보는 책상 한 구석을 장식하게 된 걸까. 동자승 인형은 그렇다 치더라도 미니마우스는 생뚱맞기 짝이 없었는데 그녀는 그게 자신의 점집에 어울린다고 생각을 했을까 아니면 장식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뭐라도 잡히는 대로 가져온 걸까. 한여름에 그녀와 함께 손님이 없는 덥고 외로운 시간을 견뎌야 할 동자승과 미니마우스인데, 이 인형들이 그녀의 고단한 하루를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는 것들일까.


그녀는 손금만 보고 가겠다는 나를 설득하여 3만원짜리 종합 사주를 보게 했고, 손금을 서비스로 봐주겠다고 했다. 사주 내용이란 건 특별할 것이 없었다. 젊어서는 고생하고 나이들어서는 좋아진다! 이제 좋아지고 있다! 사람에 배신도 좀 당했겠다! 그러면서 제법 구체적인 연도까지 언급해 가며 이제 좋아질 거라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교회 말고 절에 다녀야 한다는 조언(?)도 곁들여서.


사실 그런 내용은 뻔한 거였다. 점 보러 가는 사람들 중 젊어서 고생했다는 말에 끄덕이지 않을 자 누구이겠으며, 나이들면서 좋아질 거라는 말에 가슴이 희망으로 부풀지 않을 자 누구이겠는가. 그녀의 사주풀이는 딱 그정도였다. 그동안의 쓰린 과거를 달래주며, 앞으로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는, 누구나 바라는 딱 그 정도. 반박할 필요도 없고  의문을 품을 필요도 없는, 1만원보다는 비싸고 5만원보다는 싼 3만원이라는 가격에 맞춘 풀이였다.


열변을 토했지만 그녀의 아랫니를 장식하고 있는 고춧가루는 그대로였다. 나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여 그녀를 민망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에게 사주를 열내어 설명해 주는 그녀가 용해 보였는지 우리 뒤로 대기 손님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래서인지 그녀의 아랫니에 낀 고춧가루가 어쩐지 그날 그녀를 위한 행운의 부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책상에 있는 동자승과 미니마우스도 찾아드는 손님에 조금은 더 기운을 내는 듯 싶었다.


남편이 3만원을 지불하고 그녀와 나의 시간은 종료되었다. 나는 떠날 것이고 그녀는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흔한 말은 나를 따라 서울까지 와 있다. 지갑에서 사라진 3만원어치의 위로와 희망, 딱 그만큼의 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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