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향인 Aug 19. 2022

14살 여수, 그리고 바다

나의 여행 _19

막내랑 둘이 여수에 왔다. 막내 나이 열네 살, 그 나이에 여수에 살던 나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사는 건 돌산이었지. 6학년때부터 돌산에서 여수로 통학을 했으니까. 동그란 밥상에 전과를 펼쳐놓고 혼자 반편성 배치고사 준비를 열심히 한 기억이 난다. 하필 시험날 몹시 아팠는데, 그래도 열심히 노력한 게 헛되지 않아서 반편성 배치고사 전교 1등을 했었지. 그 덕에 입학식 때 학생 대표로 선서도 하고. 그런데 그게 썩 좋지는 않았다. 학교생활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아이들이 나라는 존재를 알게 돼버려서 어디서 뭘 하든 주목을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공부만 잘했지 실생활에선 눈치없고 요령부득이었던 나로서는 그런 질시어린 관심이 꽤나 견디기 힘들었다.


학교에서는 성적순으로 반장을 시켰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 반장이 되었는데 그것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나는 애들 앞에 나가서 말하는 것도 서툴었고 자율학습 시간에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는 것도 할 줄 몰랐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공부하는 것과 책 읽는 것 뿐이었기 때문에 반장 노릇은 잘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비포장길을 걷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웠다. 아, 그때 성적순으로 반장 하는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얼마나 말하고 싶었던가. 어쩌면 그 빌어먹을 반장을 안했더라면 학교 생활이 조금은 더 편하고 즐겁지 않았을까.


학교에서 날 마뜩치 않아 했던 건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공부만 잘 했지 다른 건 아무것도 할 줄 모르지, 눈치도 없지, 성격도 어둡고 말도 없던 나는 선생들에게도 좋은 안줏거리였던 모양이다. 게다가 내가 중1때는 온 천지에 전교조로 인한 난리가 있었고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그 일로 선생님 일곱 분이 사직을 하게 되었는데, 의협심(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그건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다니는 자식을 전혀 생각지 않은 개인의 광기였을 뿐)에 가득찼던 나의 아빠는 '선생들이 빨갱이질을 한다'는 사실에 비분강개하여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학부모 대표가 되어 선생들을 자르라고 설쳐댔다. 아무리 전교조 선생들의 신념에 동참하지 않는 교사라 하더라도 자기 동료를 자르라고 난리치는 학부모와 그 자식을 곱게 볼 이는 없었고, 나는 곧 선생들에게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아 정말, 내가 공부까지 못했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 꽤나 자주 면박당하고 쥐어터지며 학교 다녔겠지)


선생들이 수업시간에 내게 가하는 은근한 구박과 빈정거림은 아무리 눈치없는 나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는데, 한번은 점심시간에 볼일이 있어 여교사 휴게실에 들어가니 선생들이 갑자기 하던 말을 뚝 끊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그중 한 명이 말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중2, 열다섯 살 짜리 학생을 두고 여선생들이 빙 둘러앉아 귀한 점심시간을 할애해 가며 뒷담을 할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때였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 빌어먹더라도 선생은 안하겠다, 저런 무리들 틈에 섞이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


생각해 보면 여수에 살면서 좋은 일이 있었는지 싶다. 집은 가난했고 무섭고 어두웠고, 학교는 거칠고 냉정하고 사나웠다. 좋았던 기억이라는 걸 꼽아 보자면 손가락 다섯 개 정도로도 충분할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나는 틈만 나면 여수를 찾고, 오지 못할 때는 늘 그곳을 그리워한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온통 회색으로 가득찼던 나의 생활을 푸른 색으로 잔잔히 감싸 주었던 바다 때문이다. 힘들어 숨이 턱 하고 막힐 때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 나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바다, 집에서건 학교에서건 나와 함께였던 바다, 섬을 안아주듯 푸근히 나를 안아주던 바다, 내 삶에 유일하게 색을 입혀주었던 바다, 그 바다 때문이다.


그때 내 나이와 같은 열네 살 짜리 아들과 함께 여수에 오니 숙소에서 바다가 바로 보였다. 오랜만에 내 생활에 다시 바다가 깃들고 시간은 바닷빛으로 물들었다. 짧은 시내 관광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서 저녁잠을 자고 있는 아이는 이 바다가 내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고 바다는 안다. 내가 삶을 온통 장악하려 드는 회색을 푸른 바다빛으로 이겨내고 자라나서 낳은 결과물, 자랑스러운 나의 훈장과 함께 이곳을 기어이 찾아왔음을.

매거진의 이전글 전주 한옥마을의 점 보는 스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