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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Dec 19. 2022

구례에서 남원까지

나의 여행_21

작년이었던가, 나는 홀로 템플스테이를 떠났다. 목적지는 구례 화엄사. 워낙 좋은 절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풍광이 훌륭하다 하여 꼭 가보고 싶었다.

(미리 말해두자면 이 글은 화엄사에 대한 글이 아니라, 화엄사를 떠나 그 다음 목적지인 남원까지 가는 짧은 동안에 대해 쓰는 글이다)


화엄사에서 고즈넉하고도 만족스러운 1박 2일을 보낸 후, 나는 콜택시를 잡아타고 구례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여행의 다음 목적지인 남원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왜 남원을 가려고 했는지는 지금도 불확실하다. 구례와 남원이 가까이 있으니 '한 큐'에 두 군데 여행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춘향이에 막연히 마음이 끌려서였는지.


터미널에서 남원 가는 차편을 알아보던 나는, 그러나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표소의 여직원이 버스를 타고 남원으로 가겠다는 내 말을 듣고 그걸 적극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 서울 말씨를 의식했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말씨인지 알 수 없는 서울 말씨와 전라도 말씨가 어중간히 섞인 말투로 이야기했다.


"구례에서 남원까지는 버스로 한시간 반은 걸려요."

사실 상관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남원까지 빨리 가는 게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버스를 타고 남도의 끝도 없이 짙푸른 녹음을 시리도록 질리도록 느껴볼 참이었다. 버스는 털렁거릴테고 나는 졸면서 차창에 머리도 좀 박아 보다가 도저히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되는 녹색, 녹색, 반복되는 녹색에 어지러울 것이었다. 그러다보면 몸과 마음에 가득 찌든 서울의 회색을 조금이나마 벗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여직원이 "초록을 오래 차 타고 가면서 보고 싶어서" 굳이 한시간 반 동안 버스를 타겠다는 내 바람을 이해할 리는 없었다. 그녀는 다시금 아주 진지하게 알려주었다.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구례구역이 있고  거기서 무궁화호를 타면 남원까지 20분이면 간다고.

그런 상세한 '가르침'을 무시하고 굳이 버스표를 살 용기가 나지 않아, 나는 '난 버스타고 싶단 말이에요!'라는 내면의 외침을 애써 잠재운 채 형식적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터미널을 나와 마침 와 있던 택시에 올랐다.


구례구역에 도착하니 남원 쪽으로 가는 무궁화호가 적당한 시간에 출발하려고 대기 중이었다. 무궁화호라, 얼마만에 들어보고 불러보는 이름이던가. 나는 버스를 타지 못한 아쉬움도 잠시 잊은 채 옛 친구의 이름을 오랜만에 들은 양 가슴이 설레고 떨려 왔다. 표를 끊어서 객실에 들어섰다.

오랜만에 타본 무궁화호 객실은 ktx의 그것과 달리 널찍하고 여유있었으며 좌석은 앉으면 일어나기 싫을 것처럼 푹신하고 정겨웠다. 예전에 내가 대학교 다닐 때는 무궁화호만 하더라도 제법 고급 기차였다. 돈이 없어 당시 최신식이던 새마을호는 탈 엄두도 못 내고, 무궁화호 역시 주머니가 가벼워서 못 타고 가장 저렴한 통일호를 타고 서울에서 여수까지 근 8시간을 들여 집에 내려가곤 했다. 어쩌다 돈이 생겨 무궁화호를 타면 마치 우주선을 탄 것처럼 신나는 기분이었는데, 이제 그 무궁화호는 ktx같은 최첨단 열차에 밀려 지방 일부 노선만 오가는 '퇴물'이 된 것이었다. 아, 야속한 세월.


세월의 뒤안길로 서서히 물러나고 있는 무궁화호에 20분 동안 내 감정을 듬뿍 이입하고 나니 남원역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20분 동안 무궁화호 차창을 통해 바라본 남도의 녹음은 철길을 따라 흐르는 초록색 핏물같았다. 내 혈관에도 어쩌면 저 초록색 피가 흐르고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 초록을 떠올릴 때마다 이렇게 가슴이  아플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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