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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Jun 03. 2023

2023년 완도여행 1일차

나의 여행_22

완도에 있는, 바다를 품은 절 신흥사에 머무르며 남파랑길도 걷기 위해 새벽 5시부터 서둘러서 완도에 왔다. 기차와 버스와 택시를 갈아타며 왔지만 오래 묵은 기대감 덕분에 그런 여정도 그저 즐겁게만 여겨졌다. 2023년 6월 3일 오후 3시, 드디어 나는 신흥사에 도착했다.

범종각 입구에는 템플스테이 참가자를 반기는 배너가 서있다

절의 전각들과 동시에, 아니 그보다 먼저 남해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천연기념물이라는 주도와 함께 작은 섬 곳곳을 이어주는 다리들과 그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섬들, 높고 낮은 산들이 펼쳐져 있는데 이 광경을 보면서도 내가 여기에 와서 이것들을 보고 있다는 게, 이러한 풍경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풍경이었다. 6월 3일엔 완도에 가서 이걸 직접 눈으로 보고 마음에 품고 말리라, 다짐하며 엿같은 사무실을 견디고 또 견뎌서 막상 와보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그 비현실 속에 나를 현실적으로 집어넣기 위해 나는 근 두 시간을 바다만 바라보았다.

4시 반이 되니 템플스테이 담당 팀장이라는 초로의 남자가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을 모아놓고 이런저런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서 지켜야 할 규칙 정도만 간단히 알려주고 끝날 거라고 생각한 건 그러나 경기도 오산이었다. 남자의 설명은 템플스테이 규칙부터 시작해서 절의 역사, 절 구조 설명, 완도 설명에 이르기까지 한 시간을 기다려도 끝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신흥사는 스님이라고는 주지스님 포함해서 2명, 일 봐주는 사람은 말 많은 팀장 포함해서 4명뿐인 아주 작은 절이라 이 남자가 오랜만에 사람을 보니 반가워서 입이 터졌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난한 설명이 끝나고 드디어 저녁 공양시간이 되었다. 절 규모가 작다보니 공양간도 아담했다. 어지간한 식당 수준이었던 화엄사의 그것과는 자못 비교가 되었는데 나는 이렇게 작은 곳도 좋았다. 음식은 사찰 음식이라기에는 간이 좀 센 편이었지만 그래서 더 맛있기도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절 경내를 거닐며 좀 쉬어볼까 했는데 웬 개 두 마리가 눈이 들어왔다. 녀석들은 나를 보고 심드렁하게 꼬리를 흔들었는데 주지스님이 나타나자 반응이 격해졌다. 빨리 산책 나가자는 뜻이라고 했다. 스님은 산책줄을 개들 목에 걸어주고는 하나를 불쑥 나에게 건넸다. "설마 이거 제가 잡아야 하는 건가요?" 뜨악해서 물으니 그렇단다. 그렇게 해서 얼떨결에 개 산책에 동참하게 됐고, 옆에 서 있던 여자분까지 동행하게 돼서 총 세 사람이 개 두 마리와 함께 걷게 되었다.

뒤쪽 흰 놈이 사랑이, 얼룩이가 희망이다. 사랑이는 희망이의 아빠이기도 한데 이런저런 사고를 많이 쳐서 이제까지 절 살림을 꽤나 많이 거덜냈단다.

산책을 마치고 오니 주지스님과 차담을 나눌 시간이었다. 나까지 총 5명이 주지스님 방에 모여 한 시간 가량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불교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스님은 나에게 고민이 무어냐고 물었고, 나는 직장 발령 문제와 아이들 공부라고 하였다. 스님이 당장 해결책을 줄 수는 없는 문제지만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좀 편해지는 걸 느꼈다. 차담을 마치고 다들 팔찌를 하나씩 선물로 받았다.

나와보니 제법 어둠이 내리고 완도항과 다리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사람들은 바로 방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사실 완벽하게 혼자 있고 싶어서 템플스테이를 간 것이었지만 나 혼자만 빠져 있기도 좀 그래서 대화에 동참하였다. 뭐가 더 잘한 선택이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과 나는 어떠한 것이든 인연이 있었기에 같은 날 같은 절에 모여 같은 바다와 하늘을 보며 두 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눴겠지. 그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인욕'이라고 팻말이 붙은 방에 혼자 있다. ('인욕'의 뜻이 궁금하여 찾아보았는데 내가 이런 이름의 방에 묵게 된 것이 우연은 아니구나 싶었다) 화장실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 외에 아무것도 안 들리는 이 순간은 그야말로 괴괴하다. 밖에는 몇 달을 두고 그렸던 그 바다가 다소곳이 엎드려 나를 지켜주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완도에서의 첫날밤은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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