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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Jun 04. 2023

2023년 완도여행 2일차

나의 여행_23

완도여행 2일차. 오늘은 남파랑길 87코스를 걷기로 한 날이다. 새벽 예불 소리에 눈은 떠졌지만 좀 더 게으름을 피우다가 9시 좀 넘어서 절을 나섰다. 날이 좋았다.

신흥사 일주문을 지나서 셀카..이때는 몰랐지 오늘 완전 빨갛게 익으리라는 걸..

나의 계획은 먼저 완도 맛집이라는 상화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고, 근처 편의점이나 빵집 등에 가서 음료수와 빵 등 중간에 먹을 걸 사고 나서 87코스를 출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정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고 상화식당이 영업 전인 것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이리저리 헤매었다.

여기가 맛집이라는데..쩝 언젠간 먹고 말거야

여기서 밥을 먹으려면 40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해서 나는 일단 완도항을 좀 구경하기로 했다.

남해바다는 참 여전히, 꾸준히 아름답고 풍요로웠다. 그러나 나는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었으므로 시간을 계속 보내고 있을수가 없었다. 좀 헤매다가 아침이 된다는 식당을 찾아냈다. 티비 맛집 프로에도 나왔다는 집이었다. 가서 먹어보고자 했던 전복해초비빔밥(살생을 해버렸다!)을 시켰다.

평소 전복을 즐기지는 않지만 완도가 전복의 주산지라니 여기서는 이걸 먹어줘야 할 것 같았다. 가격은 15000원. 값을 지불하고 나는 빵을 사러 네이버 지도에 의존하여 뚜레쥬르로 향했다. 아, 그러나 일요일에는 영업을 안한다는 안내문이 나를 맞았다.


할 수 없이 나는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며 초코바를 간식으로 사기로 했다.(사실 87코스를 걷기 전에 이런 과정에서 힘을 좀 빼버렸다) 물 등 음료수를 4병 사고 간식까지 넣으니 가방이 제법 무거웠다. 이걸 매고 어떻게 18키로를 걷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걸어야 했다. 걷기로 했으니까.


87코스는 완도해조류센터에서 시작한다. 해조류센터까지 역시 네이버지도를 이용해서 도착한 후 87코스 시작 인증을 했다. 이러면서 휴대폰 배터리가 많이 소진되어 나중에는 배터리가 다 닳아버릴까봐 조마조마하며 걷게 되었다.

해조류센터 다음 코스는 완도타워다. 거기까지 가는 데만도 1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볕이 갈수록 뜨거워져서 슬슬 걱정이 되었다. 왜 내가 팔토시를 사지 않았지,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고 팔은 발갛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완도타워까지는 꽤나 가파른 길을 올라야 해서 나는 6천원을 내고 모노레일을 타기로 했다. 이미 1시간 이상을 땡볕에서 걸어 약간 지쳐있기도 했다. 모노레일로도 근 10분을 이동해야 완도타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노레일에서 내린 후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 또 헤맸는데, '코리아 둘레길' 전용 앱인 '두루누비' 덕분에 제대로 길을 찾았다. 참 요즘 세상 좋다. 앱이 다 알려주는 덕분에 나같은 상위 1% 길치도 용감하게 트래킹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남파랑길을 알려주는 화살표. 빨간색이 정방향이다

걸었다. 계속 걸었다. 숲길도 지나고 마을길도 지났다. 그러다 중간에 공사로 길이 끊겨 마을 주민의 도움을 받아 우회로로 걷기도 하였다. 중간중간 표시된 남파랑길 안내 리본과 화살표, 앱의 안내가 없었다면 갈림길마다 나는 길을 잃었을 것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목마르고 발이 아파 죽을 것 같다고 생각되던 순간 정자가 나타났다. 할아버지가 한 분 앉아 있었는데 내 몰골을 보고는 자리를 비켜 주신다. 밑에서 작업하던 다른 할아버지는 "아가씨, (오예 아가씨랬다!) 앵두 따먹고 가"라고 한다. 정중히 사양하고 나는 포카리스웨트와 초코바를 흡입하며 재충전을 하였다.

정자 한켠에는 '모구'라고도 불렀던 머윗대가 놓여 있어 반가웠다

아직 갈 길이 한참 남아서 오래 있을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걸었다. 제법 울창하여 어둡기까지 한 숲길을 3키로 이상 걷는데 그늘져서 좋기도 했지만 좀 무섭기도 했다. 중간중간 바다를 보게끔 전망대도 해 놓았는데 거기서 바다를 보며 무서움과 외로움을 달랬다. 하지만 두루누비 앱을 계속 켜놓고 걸었기 때문에 폰 배터리는 기하급수적으로 없어지기 시작했고 이러다가는 완주하기도 전에 배터리 잔량이 0이 될 것 같았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계속 걷다가 민박 겸 카페 겸 식당을 겸하는 곳이 나왔다. 음료수는 이미 마셨지만 폰을 충전하기 위해 커피를 사 마시기로 하였다. 여기는 구계등이라는 몽돌해변이었다. 바닷가로 내려가보고 싶었지만 갈길이 멀었고 볕이 너무 뜨거워 걸으면서 보는 걸로 아쉬움을 달랬다.

커피를 마신 민박집은 87코스를 검색하면 꼭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산책로에까지 몽돌이 깔려 있었다.

여기가 아마 87코스의 절반 정도 되는 곳이었던 것 같다. 그 말은 갈길이 아직 절반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쉬지 않고 움직여주는 내 발과 다리가 고맙고 기특했다. 걸으면서 보이는 경치도 참으로 아름다워서 계속 걷는 피로를 덜어 주었다. 비록 시간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폰 배터리도 얼마 없어서 사진은 별로 못 찍었지만.

이후로는 마을길을 4키로 정도 계속 걸었다. 목적지인 화흥초등학교는 나올 듯 나올 듯 나오지 않았다. 다시금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나를 생각했지만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나는 계속 걸었다. 두루누비에 표시된 남은 길은 갈수록 짧아지고 있었고 폰 배터리도 닳고 있었지만 아까 민박집에서 10% 정도 충전을 해 왔기에 화흥초등학교에 도착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마침내 초등학교 울타리같은 게 보였다. 저 알록달록한 것은 분명 학교일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이 맞았다. 프로골퍼 최경주의 모교라는 화흥초등학교가 조용히 나를 반겨주었다. 잘 걸어왔다, 하듯이.

화흥초등학교는 87코스의 끝이자 88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남파랑길 안내판을 찾아서 QR로 완주 인증을 하였다. 드디어 다 걸은 것이다.

폰 배터리가 그 시간까지 버텨준 걸 다행으로 여기며 나는 콜택시를 불렀다. 비록 87코스가 안내된 것처럼 18키로 남짓이 아니라 거의 20키로에 가까운 거리였지만, 옷으로 가려지지 않았던 팔과 목덜미는 완전 빨갛게 익어버렸지만 난 다 걸었다. 조용한 뿌듯함이 나를 가득 채웠다. 익어버린 피부야 시간 지나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나 혼자 20키로를 걸어냈다는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다행히 절 저녁 공양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20키로를 걸었다 하니 다들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다시 혼자 있다. 어젯밤도, 오늘밤도 나는 혼자 있지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분명 다르다. 20키로를 혼자 걸으며 눈으로 마음으로 보았던 풍광들이 내 안에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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