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향인 Aug 27. 2023

특등이 피었습니다(제스혜영 외 2명, 샘터)

독서노트 _34

참으로 오랜만에 동화를 읽었다. 같은 세사대 학우인 제스혜영 작가의 작품이 수록되지 않았다면 아마 이 동화집은 나와 인연이 없었을 터. 제스혜영 작가의 수상과 출간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어떤 내용의 동화인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구입했다.


이 동화집에 수록된 동화는 세 편이고, 동화답게 길이가 길지 않아 금방 읽힌다. 하지만 금방 읽힌다는 것이 내용까지 가볍다는 말이 되지는 않는다. 작품들의 내용은 각기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는데 어려움을 극복해 내는 꾸준하고 강인한 마음과 세상을 향한 따스한 시선이었다.


특히 제스혜영 작가의 작품인 '리광명을 만나다'는 몽골 출신 아버지를 둔 한국 소녀가 아버지를 따라 북에 가서 '리광명'이라는 또래 북한 소년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심경의 변화를 그린 작품으로, 내가 몇 년 전 시청에서 남북협력 업무를 담당한 적이 있었기에 더 관심을 갖고 읽게 되었다. 내가 어릴 적 받았던 우리나라의 반공 교육이라는 건 북한 사람들을 같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뿔이 난 괴물이나 늑대 같은 짐승으로 그리는 수준이어서, 나중에 남북 업무를 하며 그러한 선입견을 없애는 것이 꽤나 힘이 들었다.


업무를 하던 도중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실제로 북한에서 나와있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얼굴빛이 검었고 북한 사투리가 심해서(하긴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 말씨가 사투리가 아닐수도 있겠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처음에는 절반 정도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다 대화가 이어지면서 차차 뭐라고 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게 됐는데, 대화 도중 내가 나 자신을 일러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가 갑자기 버럭했다. 법 없이도 살다니, 그렇게 물러터져서야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하냐는 충고 아닌 충고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버럭에 나는 잠시 놀랐지만 곧 이 사람과 내가 이 정도까지 대화할 수 있구나,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말이 통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북에서 온 사람을 더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그래서 그 한 번의 만남이 내게는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인지 '리광명을 만나다'는 예사롭게 읽히지 않았고, 나는 마치 내가 광명이와 초록이를 따라 바닷가도 가고 장마당도 가고 동굴에도 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북으로부터의 위협과 긴장이 좀체 가라앉지 않은 지 꽤나 오랜 세월이 흐른 요즘, 모두가 광명이와 초록이 같은 마음으로 함께 바닷가도 가고 낙지 순대도 나누어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목과 대립과 긴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고 종내에는 모든 것을 끝장낼 수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미풍과 같은 평화가 문득 그리워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함께장마를볼수도있겠습니다(박준, 문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