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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Aug 20. 2023

우리가함께장마를볼수도있겠습니다(박준, 문지)

독서노트 _33

함께 장마를 본다는 건 무슨 뜻일까. 아니, 하고많은 볼것들 중에 장마를 함께 볼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박준의 시를 읽으며 이 제목의 의미를 화두처럼 내내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장마라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 길고 지루하고 꿉꿉하고 견디기 힘든 것이다. 한국의 여름이 버티기 어려운 건 바로 장마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박준은 태백에서 마음에 두고 있던 이에게 편지를 보내며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적었다고 했다.


장마가 지나면 한여름 무더위가 오고, 그걸 지내야 귀뚜라미가 우는 가을 초입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니 장마를 함께 본다는 건 길고 힘든 한국의 여름을 함께 나며 그칠 것 같지 않은 빗줄기를 묵묵히 맞고 또 맞는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겉옷부터 속옷까지 몽땅 젖으며 발목에는 흙탕이 튀기도 하는 장맛비를 같이 견디며 맞는 이와는 끊어내려야 끊어낼 수 없는 끈끈하고 강한 동지애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장마를 함께 본다는 것은 그이와 그런 관계가 되고 싶다는, 일종의 연서(戀書)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박준의 시들은 정겹고 따뜻했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책이 가끔 있는데 이 시집이 그랬다. 서로의 섣부름이라는 우리, 봄에 손목을 그어 죽으려 했던 이에게 건넨 무심하면서 다정한 질문, '그냥 가지 말고 잘 가'라는, 밥을 차려 놓았으니 굳이 먹고 가라고 말하는 누군가, 라디오를 듣다가 '비 온다니 꽃 지겠다'라고 한마디 툭 던지는 아버지..이런 일련의 시들 속에 박준 시인의 일상이 보이고 그 안에 깔려 있는 그의 다정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박준 시인의 시에 대해서는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 모양이다. 쉽고 따뜻하고 편안하다는 평부터 그렇기 때문에 고민하며 읽을 필요가 없는 시들이라는 이야기까지. 어떤 시가 더 작품성이 있고 훌륭한 것인지 시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박준의 시에는 사람들이 말하듯 분명한 정겨움과 따뜻함이 곳곳에 스며 있다. 이 거칠고 힘든 세상, 누군가의 시 한 편을 읽고 그동안 그 삭막함을 잊을 수 있다면 그의 시는 그것만으로도 존재가치가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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