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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Sep 26. 2023

비밀 엄수

나의 시_118

당신은 자리를 자주 비웠다 당신은 그때마다 주차장에 주차해 둔 당신의 전기차에 가서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었다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당신이 커다란 몸뚱아리를 차에 구겨넣은 채 무슨 음악을 들었으며 무엇을 생각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당신의 부재중이 길어질수록 사무실에서 당신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해졌고 덩치는 더욱 커져서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당신이 없어지려 할수록 당신의 자리는 더욱 넓어져서 사무실을 다 차지할 것만 같았다 당신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마침내 그 누구도 알고 싶어하지 않을 무렵 당신은 이곳을 떠나겠노라 했다 아무도 당신이 왜 그렇게 일찍 떠나려는지 묻지 않았고 그럴수록 당신의 설명은 지지부진 길어졌다 그리고 오늘, 떠날 사람 명단에 당신의 이름이 올랐고 당신은 조만간 짐을 가지러 오겠다고 했다 아마도 당신의 마지막 날은 당신이 전기차에 큰 몸을 욱여넣은 채 도망치듯 음악을 들으러 가지 않는 첫 번째 날이 될 것이었다  이제 떠날 수 있다고 당신에게 알려준 날, 나는 당신의 빈 자리를 바라보다가 사무실이 울부짖는 정글  같았던 몇 년 전에 아메리카노가 식어 한약 맛이 날 때까지 카페에 숨어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아무도 내게 커피가 얼마나 차갑고 쓰더냐고 묻지  때였다 이제 식은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않아도 되는 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그동안 차에 가서 홀로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었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지 않은 게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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