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있었다
제가 왜 거기에 있는지
거기서 뭘 해야 하는지
제가 누구인지조차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헤벌린 채
있었다
'묵음'이라고 퉁치는
글자로는 존재하되 소리는 없는
입은 있으되 봉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누구도 그 이름을 불러줄 수 없는
세상 가장 슬프고 조용한 글자
소리를 내지 못하는 글자
말하지 못하는 입
있어도 없는 듯
없어도 있는 듯
동그라미인지
숫자 0인지
알파벳 O인지
그도 아니면 그냥 무(無)인지
모든 쓸모있는 것들 사이에서
홀로 쓸모없이 웅크린
그게 거기 있었다
아니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