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향인 Dec 17. 2023

2023년 12월 17일

일상기록

TV를 무척 좋아하는 남편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돌려 보는데, 요즘은 가끔 '응답하라 1988'을 보고 있다. 이미 몇 번이나 봐서 내용을 다 외울 지경이겠지만 그래도 무척 재밌어하며 본다. 나는 티비 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은 집안에서 별로 할일도 없어 에피소드 몇 편을 같이 보았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대상 기간을 바꿔가며 몇 편이나 출시되었다. 내가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가장 좋아했던 건 1994 편이다. 나는 95학번이라서 그 시절 이야기가 가장 실감나고 재밌었다. 그 시절 연세대 농구선수들, 딱 그 시절에 입고 다녔던 옷차림, 대학 문화 등..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절을 꼽아보라고 하면 대학 시절을 꼽는 나에게 1994는 향수와 추억, 그리고 눈물샘을 하염없이 자극하는 시리즈였다.


반면 나보다 5살 많은 남편은 1994보다는 아무래도 1988이 좀 더 피부에 와닿는 모양새다. 1988년에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1988의 배경이 되었던 서울(쌍문동)에 살지도 않았으니 감흥이 조금은 덜하지만 남편은 1988에 나오는 많은 장면에서 그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는 듯했다. 나는 볼 때마다 쌍문동 아줌마 3인방의 가발임이 분명한 뽀글머리가 너무 어색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렇지만 1988년 무렵 서울의 생활상이 다소 낯선 나에게도 1988은 수시로 눈물샘을 자극하며 울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쌍문동에 사는 아줌마 3인방은 가족만큼이나 끈끈한 자매애로 뭉쳐 있으며, 직접적으로 돈 빌려달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그 속을 짚어 내어 찐 옥수수를 나눠준다는 핑계 하에 필요한 돈을 빌려주는(받을 날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는) 관계이고, 남편과 사별 후 두 아이를 키우는 선영에게는 네 행복도 생각하라는 진정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기도 한다. 그 외에도 쌍문동 골목에 깃들어 사는 여러 가족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노랫말처럼 말보다 더 진한 정으로 똘똘 뭉쳐 허름한 서울 외곽 동네의 골목길을 따뜻하고 다채롭게 만든다.


'이정도 꾸며놨으면 울어야지?'라는 제작자의 의도에 충실하게, 나는 그런 에피소드를 볼 때마다 눈물을 훔친다. 그렇잖아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접하면 잘 우는 나는 최근들어 눈물이 더 많아졌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니면 나의 자기연민이 심해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나는 1988을 보면서 수시로 주책없이 흐르는 눈물을 남편 몰래 닦아내기 위해 코감기를 핑계로 티슈를 몇 장이나 가져와야 했다.


왜 그런 에피소드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날까, 생각해 보았다. 분명 그 이야기들은 감정이 아주 메마른 사람이 아니라면 가슴 한 구석을 찡하게 울릴만큼 감동적이고 또 감상적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 수학여행에 쥐여 보낼 돈이 없다 해서 누군가 그 사정을 들여다보듯이 알고 필요한 만큼의 돈을 말도 없이 빌려줄리가 없고, 누군가가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두 아이를 키운다 하여 이웃 사람이 아직 창창한 그의 젊음을 진심으로 걱정해 줄리도 없다. 자기 자식이 간질환자라고 해서 학교 옆자리 친구에게 자식을 부탁하고, 그 친구가 마치 원더우먼처럼 필요한 때에 딱 맞는 도움을 주는 일이 현실에서 과연 가능할까. 그보다는 "왜 이런 아이가 우리 아이 짝이 되었나요?"라며 학교에 항의하여 자리를 바꾸는 학부모와 학생이 보다 현실적이다. 어쩌면 시리즈의 배경이 된 1988년에도 시리즈 안의 에피소드는 동화같은 무엇이 아니었을까.


1988을 볼 때마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겪어보지 못할, '말이 필요없는 따스한 동화같은 공동체'에 대한 대책없는 갈망 때문이 아닐까. 그러한 갈망이 살아 생전에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잘 아는 나는, 당장 내일 새벽 출근길에 입고 나갈 가장 두터운 스웨터와 롱패딩을 꺼내며 몸이라도 따뜻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3년 12월 16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