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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Dec 20. 2023

차마 하지 못한 말

일상기록

며칠 전 남편과 나, 큰애 건명이와 저녁을 먹다가 둘째 밍기 임신 출산 때의 이야기가 나왔다.(이야기를 할 때 밍기는 자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편하게 그때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밍기 임신 5개월쯤 되던 때 나는 강릉 가족여행에서 돌아오던 중 산부인과 정기검진을 받다가 뱃속 밍기가 유산되기 직전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진단을 받고서 급히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졸지에 중환자가 되어 각종 검사와 수술 전 처치를 위해 병실로 옮겨졌고, 남편은 입원과 수술을 위한 복잡한 수속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 건명이는 집에 같이 가던 엄마아빠가 갑자기 둘 다 사라진 상태에서(아무런 설명도 없이) 유모차에 방치된 채 목이 쉬고 또 쉴 때까지 울었다고 했다. 연락을 받고 뒤늦게 할아버지가 병원에 올 때까지.


어렸던 건명이에게는 그 일만으로도 충분한 충격이었을 것인데 나는 그대로 수술을 받고 기약없는 입원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졸지에 엄마와 떨어져 있게 된 건명이는 얼마나 놀라고 힘들었을까. 게다가 밍기 임신기간 동안 나는 수시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 했으니 그때마다 건명이는 얼마나 놀라고 힘들었을지, 그 어린 마음이 어땠을지 나는 짐작만 해볼 뿐이다.


위태위태하게 임신을 유지하다가 결국 양수가 새서 밍기를 예정일보다 5주 일찍 낳기로 했을 때 나의 입원기간은 가장 길었다. 그대로 낳기에는 애가 좀 작으니 뱃속에서 최대한 키워보자는 말에 일단 일주일 입원을 했고, 그 후에 유도분만을 거쳐 아이를 낳자고 했다. 나는 이 힘든 임신이 드디어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처음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입원생활을 받아들였다.


일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유도분만제가 투여되었다. 그러나 웬걸, 의사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나는 3일 가량 최대치로 유도분만제를 맞으면서도 진통 비슷한 것도 오지 않았다. 그동안은 그렇게나 세상에 일찍 나오려고 했던 밍기가 막상 나올 때가 되니 뱃속에 꼭꼭 숨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3일을 쫄쫄 굶어가며(유도분만제를 맞을 때는 언제 제왕절개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영양은 링거로 보충하며 금식을 유지한다) 진통이 오기를 기다리던 나는 지치고 절망했다. 눈앞에는 집에서 나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건명이 모습이 계속 아른거렸다. 자신이 한 말과는 다르게 출산 기미가 없어 난감해하는 의사에게 나는 울며 부탁했다. 제왕절개를 하게 해 달라고. 그리고 다음날 오후 2시 반, 수술방에서 체중 2.37kg에 폐가 다 펴지지 않아 숨을 잘 쉬지 못하는 밍기가 태어났다.


수술 후 4박 5일동안 나는 내내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다가 간신히 회복한 후 겨우 퇴원했고, 신생아 중환자실에 있던 밍기는 좀 더 오래 남았다. 마침내 자유를 얻은 나는 드디어 건명이를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집에 날아서라도 가고 싶었다. 집안에 들어서자 건명이가 거실에 있는 게 보였다.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잠든 건명이 곁에 가서 그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코 밑에는 콧물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고 손톱은 다소 긴 채로 그 아래가 거뭇거뭇했다. 시아버지가 건명이를 보살펴 주시기는 했지만 그런 부분까지는 살피기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내가 계속 건명이 옆에 있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며 이 미안함과 짠함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다. 그리고 그때 마음 속으로 약속했다. 다시는 이렇게 오래 너와 떨어져 있지 않겠다고.(그 약속은 밍기가 3살이 되던 해에 오른손에 3도 화상을 입고 수술을 위해 입원하게 되면서 지키지 못하게 됐다)


건명이에게 밍기가 태어날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병원에서 퇴원하고 처음 보았던 건명이의 모습이 어땠는지, 그리고 그 때 내가 건명이에게 무슨 약속을 했는지를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아직도 나는 그 무렵을 생각하면 다소 꼬질한 모습으로 거실 한 구석에 잠들어 있던 건명이가 떠오름과 동시에 눈물이 나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때를 생각해도 눈물이 나지 않게 되면 그때는 건명이에게 이야기해야겠다. 엄마랑 절대 떨어지지 말자고, 우리 약속이라고.

(그런데 몇 년 후면 건명이가 군대를 간다....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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