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향인 Dec 24. 2023

나의 민법 교수님

일상기록

나이가 들어서인지 얼마 전부터는 예전에 알고 지냈다가 지금은 소식을 알 길 없는 이들의 근황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는 일이 생겼다. 엊그제는 대학 때 교수님들이 어떻게 지내는지가 불현듯 궁금해졌다. 옥** 교수님, 양** 교수님 등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다들 정년퇴임을 하신 후였다. 그래 그럴 때도 되었지..하다가 민법 교수님이셨던 송덕수 교수님이 내신 책이 연관 검색을 타고 올라왔다.


책 표지에 그려진 교수님 모습을 보니 반가움이 밀려왔고 세월을 거슬러 법학관 강의실에 앉아 선생님의 얼굴을 보며 민법 수업을 듣던 그 시절이 순식간에 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선생님은 아담한 체구에 언제나 목소리는 조용하고 조곤조곤하였다. 강의 내용은 그야말로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서 민법 수업 시간에는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조차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선생님은 늦은 나이에 따님을 얻게 되었는데, 동료 교수님들의 축하에 고개를 살짝 떨구며 "나이는 먹어가지고 부끄럽습니다"라고 답하시곤 했다.(물론 그렇게 겸손했던 모습과는 달리 따님이 자라면서   선생님은 강의 중에 따님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수업 시간에 다른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던,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어 보이던 그분이)


책에 수록된 저자의 말과 선생님께서 공들여 짜셨을 목차를 훑어보니 이 책을 사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생겼다. 하지만 나는 금세 이성을 찾고 나의 욕구를 주저앉혔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학창시절에 민법을 잘 못했고 어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민법은 총칙과 물권, 채권, 친족상속 분야로 이루어진, 조문만 1118조에 달하는 방대한 법이다. 어쩌면 법학 수업의 4분의 1 정도는 민법과 그에 관련된 수업일수도 있고, 민법에서 파생된 법의 일반원칙은 다른 법에도 적용될 정도로 민법은 다른 모든 법률의 근간이 되는 법이다. 하지만 나는 그 중요하고 비중있는 민법이 너무 어려웠다. 1학년 때에는 '이 중요한 민법 1조 정도는 외우고 있어야지!'라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민법 1조를 혼자 외어보기도 했으나 총칙 수업을 지나 물권, 채권 수업으로 진행될수록 나는 나의 이해도와 암기력에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형법이나 국제법 등 다른 법은 비교적 잘 했고 흥미를 느끼기도 했으나 민법이 재미있다거나 쉽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따라서 성적도 그저 그랬다.


나이가 어리고 그래도 머리가 비교적 잘 돌아가던 학창시절에도 민법은 난공불락의 과목이었는데, 이제 곧 오십이 되는데다 민법은 쳐다보지도 않은 지 한참 지난 내가 교수님이 쓴 책에 나오는 민법 논문 내용을 이해할리가 만무했다. 내 수준과 한계를 무시하고 이 책을 샀다가는 안그래도 여유공간이 별로 없는 거실 책꽂이만 더 좁아지는 결과를 낳을 거였다. 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책을 살까 말까 고민했던 내 마음을 접어 넣었다. 선생님께는 뭔가 죄송했지만.


이십여년 전, 어리고 팔팔하고 근거없는 자신감에 차 있던, 하지만 학점은 그리 좋지 않았던 나를 민법 송덕수 교수님을 비롯한 다른 교수님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 기억을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겠다. 하지만 법학을 그리 잘하지 못했던 이 불민한 제자는 나이 쉰을 바라보는 이 순간에도 가끔 그 시절을 추억하며 그 당시 교수님들의 안부를 궁금해하곤 한다. 이 그리운 마음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뜻하지 않은 곳에서 교수님에게 가 닿을수도 있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크리스마스 회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