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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Dec 28. 2023

Naming sense

일상기록

제주여행 첫날, 바닷가 산책을 갔다가 뜻하지 않게 꽤 많은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던 나와 남편은 겨울이라는 날씨가 무색할 정도로 땀을 뻘뻘 흘리게 됐다. 마침 기온도 15도에 육박할 정도였다. 산책을 마치고 어디로 갈지를 궁리하던 우리는 자연스레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자고 합의를 봤고, 마침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유부단'이라는 아이스크림 전문점이 있다는 걸 알았다.

'우유부단'이라는 단어가 본래 의미만 놓고 보자면 썩 긍정적인 뜻은 아니지만 이 아이스크림 전문점의 주력 메뉴가 목장에서 직접 기른 소의 우유를 활용하여 만든 우유 아이스크림인 걸 생각하면 꽤나 잘 지은 이름이라 할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은 이름값(?)을 하듯 정말 부드럽고 맛있어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다 먹지 못하는 나도 하나를 다 먹었다. 물론 우유만 마시면 배탈이 나는 남편은 호기롭게 아이스크림 하나를 다 먹고 나서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지만.


꽤나 재미있게 잘 지은 아이스크림 전문점 이름을 보니 그런 작명 감각(naming sense)이 부러워졌다. 보면 여기저기에서 아주 독특하게, 톡톡 튀는 감성으로 잘 지은 가게명이나 상품명이 많은데 어떻게 그런 기발한 생각을 해냈는지 나는 그런 이름을 볼 때마다 뒤늦게 감탄만 할 뿐이다. 나는 그런 감각이 어렸을 때부터 '꽝'에 가까웠으므로.


대학을 갓 졸업했던 20대 초중반 무렵, 나는 한국일보사에 사무직원 공채로 들어갔다. 당시 입사성적이 꽤 좋았던 관계로 나는 사장님의 눈에 들어 기획조정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때 총 일곱 명이 합격했는데 여자는 나 하나였다)  그 무렵 한국일보는 다른 신문사와 마찬가지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새로 구축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려면 눈에 잘 띄고 기억하기 쉬운 url을 만들어야 했다. 기획조정실 실장님과 다른 직원들은 나에게 그 숙제를 던져 주었다. 네가 가장 어리고 젊어서 감각이 신선할테니 '쌈박한' 이름을 만들어보라는 거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학창시절 공부만 잘 했지 창의력이라고는 없던 나에게 그건 너무나 어려운 숙제였다. 나는 끙끙대며 고민하다가 회심의 아이디어를 냈다. 한국일보에서 '한국'이라는 단어가 중요하고, 한국=republic of korea니까 이걸 줄여서 rok.com이라고 하면 어떠냐고 했다.


내가 내심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며 내놓은 아이디어를 들은 사람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곧이어 여기저기서 성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 너무 구리다, rok.com이 뭐냐, 여기가 군대냐, 감각이 젊을 줄 알았는데 실망이다 등등.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한국일보라며, 그럼 rok.com 정도면 괜찮은 거 아냐? 이렇게 생각했지만 차마 내놓고 말할 수도 없었다.(사실 나는 지금도 rok.com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모르지만 한국일보 홈페이지의 url은 hankooki.com으로 결정되었다.(찾아보니 지금은 hankookilbo.com을 사용하고 있다)


그 뒤 상업은행과 한일은행 등이 imf를 거치며 합병하여 새 은행명을 공모할 때에도 내심 뽑히기를 기대하며 참여해 보았지만 보기좋게 물 먹고 말았다.(그때 '우리은행'이 합병은행의 새 이름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 일을 끝으로 나의 '이름짓기' 도전은 막을 내렸다. 아무리 해도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순간에 파고드는 그럴싸한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릴 때도 생각이 안났는데 머리가 차츰 굳어지는 이 시점에 그런 아이디어가 떠오를 리 만무하다.


회사 업무공지 게시판에도 간간이 어떤 센터나 사업 등의 이름을 공모하는 게시글이 올라오고, 어떤 것은 적지 않은 상금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눈만 한 번 반짝 빛냈다가 마음을 접곤 한다. 뭔가 도전해보고 싶어도 그런 류의 공모전만 보면 머리가 딱 굳고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걸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나의 두 아들들이 평생 사용할 이름을 남편과 함께 지어 주었고(물론 인터넷 작명소의 도움을 받기는 했다), 그 '작품'은 아이들이 살아있는 동안은, 아니 죽은 후까지도 오래도록 남아있을테니 그 정도면 성공한 작명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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